제 2 절 행위자 네트워크로서의 소프트웨어
ANT는 ‘사회’를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들의 집합체’로 본다. 소프트 웨어와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은 인간 행위자와의 관계를 통해 의미 있는 방식 으로 사회화한다. 기존 소프트웨어 연구들에서 보지 못한 소프트웨어의 사회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ANT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 간 의 상호작용에 의한 순환과 운동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와 인간의 다양한 경험 과 지식은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되고 이루어진 다. 어떤 한 시점의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체는 서서히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ANT에 의하면, 이 진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기존의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는 ‘번역’(translation)’ 과정을 통해 서로 만나게 된다.
이렇듯 새롭게 만난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들은 서로의 특성을 교환하고 비인간 행위자들과 인간 행위자들 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혼종 (hybrid)’이 생겨난다. 새롭게 만들어진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집합체 는 각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전에 지향했던 방향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지 향하는 ‘치환(displacement)’ 단계를 거친다.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는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ANT의 관점은 소프트웨어가 변화하는 과정, 소프트웨어의 진화를 설명 하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2절은 행위자 네트워크로서 소프트웨어에 대 해 논의한다. 소프트웨어 연구에서 ANT 관점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ANT의 이 론적, 방법론적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다.
로세서는 글쓰기와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이며, 포토샵은 그림 이미지 조작과 합성의 소프트웨어다. ‘시리(siri)’ 등과 같은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들은 말을 인식하고, 영상들도 소프트웨어를 통해 편집되고 있다. 전 세계 10억 명 이상 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페이스북(facebook)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프트웨어로 구현했다. 모든 디자이너들 과 예술가들은 미디어 소프트웨어를 통해 작업을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 과, 관계 등과 같이 보이지 않던 것들도 디지털화된 데이터로 처리되고 있다 (Manovich, 2013a). 우리가 페이스북에 남기는 댓글, ‘좋아요’ 클릭, 공유 등 의 행위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계산돼 해당 게시물의 인기도를 측정하는 기준 으로 활용된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이메일, 통화 내역 등 관계의 흔적은 페이스북 친구 추천의 근거로 활용된다. 상거래 사이트 등에서 봤던 상 품의 목록 등은 페이스북 안에서 맞춤화된 광고를 제시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오세욱‧이재현, 2013).
내가 한 모든 행위들은 디지털화된 데이터로 축적되어 구조적으로 쌓이고 있 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는 소프트웨어 고유의 알고리즘으로 분석된다. 미디어 저작 등 기술적으로 같은 기능을 구현하더라도 어떤 알고리즘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에 따른 결과는 달리 주어진다(Mackenzie, 2007). 우리의 행위는 디지털화된 데이터로 축적되고 축적된 데이터는 알고리즘에 따라 분석돼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미디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미디어의 기능이 구현된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연구자들만이 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구들은 소프트웨어가 구현한 미디어 기능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이용하고 있냐를 위 주로 이루어져왔다. 소프트웨어가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자율적으로 만들어 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글’의 ‘빠른 교정’과 같은 기능의 경우, 맞춤법에 어긋나게 입력된 문장들 을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수정해 준다. 이때 알고리즘은 ANT 관점에서 실 제적인 행위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구현된 소프트웨어는 실재성 과 물질성을 갖고 있으며, 알고리즘에 반영된 지식과 문제 해결 전략은 소프트 웨어가 사회를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프트웨어와 사회는 상호적 (reciprocal)이다(Manovich, 2001). 따라서 ANT는 이미 구성요소들이 완벽하 게 갖춰진 실체들보다는 한 행위자가 존재하는 실체가 되기까지 겪는 논쟁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글’의 ‘빠른 교정’ 기능은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 직접
문장을 수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이후 입력한 문장 중 맞춤법에 어긋나 는 부분을 자동으로 수정하도록 기능이 진화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빠르게 교정할 것인가와 관련한 논쟁이 이어지면서 기능이 개선돼 현재에 이르렀다.
‘빠른 교정’ 기능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험들(trials)’을 통 해 만들어진 것이다(Latour, 1991/2009).
따라서 소프트웨어는 기술적, 기능적적으로만 분석해서는 입체적으로 밝혀낼 수 없다. 소프트웨어의 기능 하나 하나가 실재성을 갖게 되는 그 과정을 분석 해야 한다. 실재란 어떤 고정된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라 관계들 속에서 만들 어지지는 것으로 항상 복합적 성격을 갖고 불확실성과 가변성을 지닌 집합체 (assemblage)다(Latour, 1991/2009). 소프트웨어 연구 관점에서 소프트웨어는 특정 제품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내재되어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어 가고 있는 상황 또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위능력을 갖고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 행위자들 및 비인간 행위자들 과 어떠한 과정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밝힌다면, 변화하는 소 프트웨어를 추적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그 소프트웨어의 특성을 밝힐 수 있 다. 즉, 소프트웨어가 진화해 오는 궤적을 분석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가 다양한 행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은 그 소프트웨어 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과 같으며, 자체적으로 기능을 구 현하고 다른 소프트웨어와 연계를 맺으며 기능을 확장해 진화해 가는 과정과도 같다. ANT 관점을 소프트웨어 연구에 적용할 경우 얻는 장점은 크게 네 가지 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 전통적 미디어와는 달리 컴퓨터라는 장치를 통해 구현돼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다양한 미디어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둘째, 다양 한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는 소프트웨어의 진화 궤적을 추 적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적 틀을 제공한다. 소프트웨어의 진화를 네트워크 형성 과정으로 규정해 분석할 수 있다. 셋째, 소프트웨어에 내재하는 알고리즘, 코드 등의 실제적 효과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알고리즘 등이 실제로 행동하 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들과 관계 맺음을 통해 갖는 행 위 능력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넷째, 인간 중심적 사고에 서 벗어나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자율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소프트웨어를 인 간과 동등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소프트웨어 이용의 결과만이 아니 라 이용의 결과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동등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ANT의 이러한 장점은 이론적 측면에서 소프트웨어가 지속적으로 새롭게 구 성하고 있는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분석하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기존 소프트웨어 연구들은 기존의 이론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소프트웨어의 특 성을 감안한 새로운 이론적 틀은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ANT 자체 도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소프트웨어가 지속적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미 디어 환경을 다양한 행위자들과의 관계 맺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안적이지만 새로운 틀을 마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맺음, 즉 교호 (association)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에 이용자의 이용 행위가 결 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그에 따라 소프트웨어가 변화하는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 연구의 방법론적 측면에서도 ANT 관점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기본적으로 기술적 대상으로 다양한 기능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기존 연구들에서 자주 보이는 한계점은 복잡하 고 세세한 기능을 기술적 관점에서만 분석하던가, 세세한 기능의 변화는 무시 하고 소프트웨어를 전체적인 하나의 기술적 대상으로만 분석하는 것에 치우지 고 있다는 점이다. ANT 관점을 소프트웨어 연구에 적용할 경우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각각의 세세한 기능을 소프트웨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행위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세한 기능 행위자들을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고려하면서 전체적으로 형성하는 네 트워크를 분석한다. 이는 각각의 기능들이 갖는 의미와 함의를 다루면서도 소 프트웨어가 전체적으로 갖는 의미와 함의를 동시에 연구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