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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 원폭생존자 조사의 경과와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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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제도화 과정

1) 전후(戰後) 원폭생존자 조사의 경과와 그 성격

패전 후 GHQ의 점령 하에서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은 다른 전쟁피해자들인 소위 전재자 (戰災者)와 차별화되지 않았다. 전시구호와 전재부흥의 관점에서는 이때까지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전재민들은 다른 모든 전쟁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공습의 피해자 범주 에 뭉뚱그려져 있었다. 전재민들의 구호를 예로 들어보자면, 종전 직후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전시재해보호법에 따라 구급구호를 받았는데, 히로시마와 나가 사키에서 공습의 피해를 입은 부상자들도 이 법에 따라 설치된 임시구호소들에서 치료를 받았다 (広島県原爆被爆者団体協議會, 2001:361).

피해 규모가 심대하고 특별했지만 동법의 규정에 따라 재해 후 60일인 1945년 10월 5일 과 9일을 기해 구호소가 폐쇄되면서 이후의 구호는 개인들의 몫이 됐다. 같은 해 12월에 히 로시마의 전재자들이 모여 <히로시마전재자동맹대회>를 개최해 구호를 호소했으며, 곧이어 이듬해 1월에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수용을 위한 <히로시마전재고아육성 소>가 개소되기도 했으나 이들을 위한 특별한 구호 활동은 여전히 진행되지 않았다. 공습 1 년을 맞는 1946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는 소박한 행사가 열렸는데, 그것 은 히로시마 시와 <히로시마시전재사몰자공양회>가 공동주최한 <전재사몰자1주년추도법회>

였다 (広島県原爆被爆者団体協議會, 2001:361).

전재민 중에서도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민들이 문제가 된 것은 의료적, 정책적 측면에서이기보다는 군사 및 과학적 관점에서였다. 연합군의 공습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 키에 떨어진 신형무기가 종래의 무기와는 차원이 다르며, 원자폭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장 처음으로 조사를 벌인 곳은 일본 군부였다 (笹本征男, 1995; 17-8).35) 전황(戰況)이 문 제였다. 공습 후 이틀 째 되던 날인 8일에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미군 또한 이미 오키나와에 상륙해 있었다. 일본군부와 정부당국 은 신형무기의 공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대책을 35) 笹本征男(1995)의 같은 책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 원폭투하 후 16시간 만에 내놓은 성

명에서 이것이 TNT폭약의 2만 배에 해당하는 신형무기라고 언급했을 때 일본 군부는 <敵性情報>(외 국방송을 듣고 기록한 것)를 통해 이 내용을 군부에 회람했다. 일본군과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이 ‘원 자폭탄’을 개발했다는 정보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세울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과학적 조사를 동반해야할 이 군사적 관심은 공습 직후 다른 어떤 것보다 시급하고 즉각적인 조치로 이어졌다.

대본영은 8월 8일, 히로시마 시에 대본영조사단을 파견했다.36) 대본영조사단은 8월 10일 조사를 정리하면서 이것이 ‘원자폭탄’이라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에는 폭탄의 영향이 극히 심대하며 특히 방사선에 의한 영향으로 추정되는 피해 즉 백혈구가 감소한 자, 외상은 없었 으나 폭격 후 1~2일 내 갑자기 사망하는 자 등이 상당하고 원폭 투하 이후에도 중심부근의 토사에서 계속 방사선이 검출되고 있다는 기록이 담겼다 (笹本征男, 1995; 18). 대본영조사단 의 초동수사와 함께 육군성 의무국 소속 히로시마재해조사반의 조사활동도 이뤄졌다. 이 조 사반은 군의들로 구성된 것으로 군사전략적 판단을 위한 대본영조사단의 것보다는 일반 시 민의 심각한 피해에 대한 조사가 일차적 목적이었다. 이들은 원자폭탄의 인체에대한 효과와 피해의 조사, 신병기의 전상(戰傷)의 연구와 치료방침을 수립할 목적으로 이 연구를 수행했 다 (笹本征男, 1995: 19).

군부의 즉각적인 조치는 학계와도 연결됐다.전시 중 레이더 기술이나 항공 기술 개발을 비롯해 원자폭탄제조 계획의 실행에까지 군사과학연구개발에 있어 군부와 학계의 긴밀한 연계를 고려할 때(나카야마·요시오카, 2000:21-34),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 군부는 자체 초동수사를 지시함과 동시에 학계에 즉각 도움을 요청했다. 육군인 도쿄사단사령부가 8월 6일 도쿄제국대학에 히로시마 조사를 요청하고 해군에서는 8월 7일 히로시마 시에 해 군성이 해군히로시마조사단을 파견함과 동시에 오사카제국대학에도 히로시마 조사를 요청, 오사카제국대학조사단이 8월 9일 히로시마 시에 파견됐다. 구레(吳)진수부도 원폭공격 직후 부터 히로시마 시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나가사키에서는 8월 10일에 나가사키지구헌병대, 8 월 14일에 쿠레진수부조사단이 조사에 들어갔다. 8월 13일, 서부군에서 요청된 규슈제국대 학도 조사에 참가했다 (笹本征男, 1995: 19).

일본정부의 조사에서는 원폭투하 직후에 내각을 기반으로 설치된 임시원폭대책위원회가 히로시마 시에 기술원조사단을 파견했다. 기술원은 제2차근위내각의 각의결정 ‘과학기술신 체제확립요강’에 근거해 1942년에 발족한 곳이다. 조사단의 결과는 신병기에의 방어대책으 로서 신문에 발표됐다. 기술원조사단장으로 히로시마에 파견된 기술원참지관은 8월 8일 히 로시마에 들어가 조사하고 8월 10일에 조사결과를 도쿄에 타전했다고 말했다. 기술원조사단 장은 “피해상황과 원폭 방사선에 의한 희생, 잔류방사능 등의 조사결과를 보고, 원폭의 방 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현 상태로는 조속한 대응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정을 밝혔다”고 자신의 보고 내용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한 개의 폭탄에 의한 심히 36) 단장은 군의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참모본부의 제2부장이, 단원은 참모본부에서 세 명, 육군성에서 세

명, 육군항공본부의 기술부 한 명, 이화학연구자 한 명 등 총 서른 명으로 구성됐다. 조사단의 주체는 육군 기술장교들이었다. 일본 육군은 전쟁 중 ‘2호작전’이라는 원폭개발계획을 개시하고 있었다. 육군 항공본부는 이화학연구소에 원폭개발계획을 위촉했다. 대본영조사단은 이 ‘2호작전’에 종사한 기술장교 와 물리학자들로부터 구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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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에너지의 발생은 원자의 파열을 이용했다는 것 이외에 현재의 과학상식에 있어 추 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笹本征男, 1995: 20).

이처럼 초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전재민에 대한 구호에 있어 일본 정부의 관심은 다 른 도시들의 전재민들에 대한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지만, 신형무기로서의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도시와 시민들에 대한 군부와 학계의 관심은 지대했다. 물론 GHQ 점령 직후 군사과학연구개발을 엄격히 금하는 정책에 따라 그 관심이 공식적인 활동 으로 전개되는 데 있어서는 다소 제약이 가해졌고, 결정적으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한 작 업이었으므로 일본 정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GHQ 역시 점령 직후 일본의 독자적인 원폭개발 관련 연구를 금지시키기는 했 지만 원폭의 실제 효과에 대한 연구, 특히 인체 피해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일본 측의 전 면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실험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서의 원 자폭탄의 위력과 그 효과에 대한 관심이 원폭 투하 결정의 한 원인이었다고 지적될 만큼37) 미국의 군부와 과학그룹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 기울인 관심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같은 공동조사에 협력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점령 기간 동안의 통치 체제에서 자국 의 과학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좀 더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笹本征男, 1995;

나카야마·요시오카, 2000).38)

원폭의 인체 효과(영향)에 대한 이 두 국가의 공통된 관심사는 패전을 공식화하고 한 달 이 지난 1945년 9월 14일 일본학술회의(JSC, The Science Research Council of Japan)가 처 음으로 다수의 과학자들을 동원하여, 원폭투하 후의 상황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것에 반영됐다.39) 이 위원회는 의학적 효과뿐만 아니라 건물 손상, 열 손상, 대기효과, 식물 및 야생동물에 대한 효과 등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이 가운데 의학 분야는 츠즈키 마사오 (都築正男)40) 도쿄대 교수가 담당자가 되었고, 그는 이후 일본과 미국 두 나라의 방사선 인 37) 트루먼 대통령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원자폭탄의 투하로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켜 미국과 아시아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0-70년대 이후 그에 대한 수정주의적 설명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이미 그해 5월에 항복 선언을 하고, 일본에 대한 본토공격이 심화되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주장들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당시 공산주의 진영인 구소련연방이 2차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중국 및 아시 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확대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의 국내정 치적 입장에서는 일본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 무심한 관료주의적 결정의 하나로 대규모의 예산을 투입 해 개발한 원자폭탄을 사용함으로써 그 효과를 배가하고, 과학 및 군사적 목적의 실험을 행하고자 했 다는 주장들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Gusterson(2004:65)을 참조할 수 있다.

38) GHQ 점령기간 동안 일본 정부와 군부가 이 연구에 협력한 것에 대해서는 笹本征男(1995)를 참고할 수 있다

39) 몇몇의 조사결과를 게재한 <Collection of the Reports on the Investigation of the Atomic Bomb Casualties>가 일본학술회의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1945년 보고 중에는 유황에 포함된 중성자유도

32P 방사능의 측정, 원자폭탄의 폭심지 측정, 기상학 데이터, 지붕기와에서 열방사에 의해 탄 범위의 측정, 방사성강하물의 측정의 이번 선량재평가활동에 귀중한 데이터를 제공했다 (広島市, 2011:155).

40) 都築正男(츠즈키마사오, 1983-1961)은 태평양전쟁 당시 동경제국대학의학부교수면서 해군군의중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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