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히바쿠샤 범주의 경계 구성과 통제
1) 히바쿠샤의 법적 정의
2007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오랫동안 일본정부가 위법한 행정적 조치로 한국원폭피 해자들을 방치한 것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원고는 일제시기 미쓰비시 히로시마조선소 등에 징용됐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평택지부 회원 46명이었다. 일본에서 이 들의 소송을 도왔던 변호사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원고들에게 이 결과를 설명하고 위자료 배분 등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소송에 참여했거나 재판을 도왔던 여러 명의 한 국인원폭피해자들이 자리에 모였고, 거기에 처음 온 듯한 노인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갖 가지 서류를 담은 노란 봉투를 소중하게 들고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그를 가리키며 한 회원이 연구자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저 사람도 히바쿠샤(被爆者)야?"
연구자는 그 노인이 그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들었어도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 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은 그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인지는 몰라도 일본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히바쿠샤는 아닐 것이라는 어조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리 고 같은 날 연구자는 그렇게 질문을 했던 이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인 즉 본인이 소송관계로 일본에 자주 오가면서 병원에도 자주 입원을 했는데, 한번은 척수를 뽑 아 '무슨' 검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에서 본인은 방사능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처럼 직접 폭탄 투하되는 것을 보고, 등 전체에 화상을 당한 ‘히바쿠샤’ 가 방사능 영향을 받지 않았으면 누가 영향을 받은 것이냐며, 그 검사라는 것도 그렇고 과 학이라는 것도 모두 엉터리라고 열변을 토했다.
아마도 여기서 그가 말한 ‘무슨’ 검사라는 것은 피재증명서나 증인, 증언 등과 같은 행 정적 절차로 피폭 여부를 심사하는 것과 달리 척수 세포의 DNA 변형 정도를 보아 피폭 당 시 어느 정도의 방사능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러 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행정적 심사 및 의학적 진단을 거쳐 피폭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 은 이와 같은 생물학적 검사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피폭 당시의 증인이나 상황 진술, 각종 증명서 등에 대한 행정 심사가 피폭자 자격을 부여하는데 있어 제일 중요 한 절차다. 어째든 원자폭탄을 맞은 것이 확실한 그로서는 자신에게 방사능의 영향이 없었 다고 말하는 그 연구결과는 너무나 황당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연구자의 머릿속에서 그 황당함은 곧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연결됐다. 일본 정부
로부터 인정을 받은 ‘진짜 히바쿠샤’인 그에게 정말 방사능의 영향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면 그의 말처럼 방사능의 영향을 측정한다고 하는 그 검사가 엉터리였던 것일까?만약 방사 능의 영향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방사능 영향을 받을 만한 사정에 있었던 이들로 규정된 원폭원호법의 지원 대상으로서 '히바쿠샤'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을까? 또 그 검사 가 ‘엉터리’가 아니고 그렇게 정확한 검사라면 왜 그것을 전면적으로 피폭자 지위인정 여부 를 심사하는 수단으로서 채택하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히바쿠샤란 누구며, 누가 어떤 기준 에서 그들이 히바쿠샤임을 결정하는가?
1957년에 제정된 원폭의료법은 1994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현행 원폭피해자원호법의 뿌 리로서 “히바쿠샤”(被爆者)에 대해 “연 2회의 건강진단에 의한 건강관리, 건강진단에 의해 이상이 발견된 경우에는 정밀조사의 실시, 원폭의 방사능에 기인하는 장해를 가져 후생대신 의 인정을 받은 자에게는 의료의 급부가 행해질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56) 그리고 이 “의료 의 급부”를 받을 수 있는 ‘히바쿠샤’는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를 받은 자다”(제2조)라고 정 의했다. 이렇게 ‘히바쿠샤’라는 개념에 법적이고 표준적인 정의를 선언한 원폭의료법의 제정 은 이것이 단순히 특정한 형태의 어떤 인구집단에 대한 수사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의 경계 짓기(boundary-work)(Gieryn, 1983:792)가 아니라, 국가가 이들에게 공인된 법적 자격을 부 여하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관련된 여러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을 구체화하고 정당화하는 경 계 짓기를 의미했다 (Lynch, 2004:165).
또한 이 법에서 피폭자건강수첩이라는 것은 한국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수첩’(手帳, 테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히바쿠샤가 방사능의 영향 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피폭자건강 수첩을 교부받은 자라고 규정된 것은 ‘테쵸 혹은 수첩이 있어야 히바쿠샤’라고 하는 의식과 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만나는 일본 시민운동가들은 이들에게 ‘히바쿠 샤인가 아닌가’를 묻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질문들은 대개 “원폭피해자라 하더라도 테쵸(수 첩)가 없으면 아직 히바쿠샤가 아니다, 그러니까 수첩를 받아야 한다”라거나 혹은 “수첩을 받아서 히바쿠샤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 외 곽에서 원폭투하 당시 떨어진 낙진을 맞아 방사선의 영향이 있었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 신들을 히바쿠샤가 아니라 ‘겐바쿠타이겐샤原爆体験者’ 즉 ‘원폭체험자’라고 칭한다.57) 그들 은 아직 수첩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원폭체험자’들은 정부에 자신들에게도 히 바쿠샤 자격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수첩을 받지 않은 사람 혹은 받을 수 없는 사람은 히바쿠샤가 아니라는 이런 인 식들은 히바쿠샤는 단순히 원폭피해자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인증 받은 공식적 자격을 취득 56) 의료급부의 내용은 시행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히로시마시현, 나가사키시현 등에서 매년 발간하는 원폭피폭대책사업요람 등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2011년도 히로시마시의 요람은 다음과 같다. 広島市社会局原爆被害対策部, 2011, 『原爆被爆者対策事 業概要』, 広島市.
57) 広島黒い雨連絡協議会、2012、『黒い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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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를 상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첩은 “그 사람이 원자폭탄 피폭의 생존자인지를 판명 하는 증명서의 일종”으로 “법적으로 그 개인의 원자폭탄 피폭의 경험을 인증”(Yoneyama, 1999:93)하는 것이다.
히바쿠샤의 자격을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 받은 자로 제도화시킨 이 지점은 그 이전까 지 국가에게 피해를 보상할 것을 요구해왔던 원폭피해자들이 이제 지원의 대상이 되고, 국 가는 국가가 제공할 자원들을 수급할 자격의 범주를 구성하고 통제하는 좀 더 강력한 주체 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한다. 피폭된 신체라는 상태가 아니라 수첩이라는 관료제적 증명서 가 히바쿠샤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 국가는 이 수첩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 분하는 기준, 즉 히바쿠샤의 경계를 만들고 통제하는 행정관료적 주체로 등장한다. 이제 이 행정관료적 주체로서 국가는 법적 정의와 행정적 실행 규칙, 관료제적 심사 절차 등을 통해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자로서 히바쿠샤를 인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첩을 교부 받을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원폭의료법은 이어서 그 피폭 자건강수첩을 교부받을 수 있는 자격의 범주도 제시하고 있다. 이 범주는 여러 차례의 법률 개정과 폐기 그리고 새로운 원폭피해자원호법 제정 과정에도 그 기본 정의는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는데, 여기에서 그 대상은 크게 네 종류로 분류됐다58) (被爆者援護法令研究会 編,2003:160).
1호. 원폭투하 당시에 히로시마 시 혹은 나가사키 시의 구역 내 혹은 정부 시행령으로 정한 이 두 도시의 인접 구역 내에 있었던 자 (이들을 직접피폭자라 부른다) 2호. 원자폭탄이 투하된 때부터 계산하여 정부 시행령에 정해진 기한 내에 앞에서 규정
된 구역 내에 있는 정부 시행령에 정해진 구역에 있었던 자 (입시피폭자)
3호. 앞에서 규정된 사람 이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때 혹은 그 후에 신체에 원자폭탄의 방사능 영향을 받을만한 사정 하에 있었던 자 (구호피폭자)
4호. 피폭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그 사람의 당시 태아 (태내피폭자)
이 법안에서 직접피폭자라 함은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로서 원폭이 작열하는 순간 그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입시피폭자와 구호피폭자라 함은 원폭 투하 순간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그 이후 일정 기간 안에 원폭투하로 인한 잔류방사선 에 영향을 받은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방사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당시 태아, 즉 방사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구역과 시기 안에 수태되어 있던 태아가 태내 피폭자로 인정된다. 그런데 법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법적 규정에서 피폭자는 방사능 영향 을 받은 자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의 기준은 ‘구역 내’ 혹은 ‘기한 내’라고 되어 있다. 이는
58) <원자폭탄피폭자의의료등에관한법률 제2조> (1957년 3월 31일 공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히바쿠샤가 방사선량이나 피폭량 등과 같은 수치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장소와 시간이 방사선 영향의 지표가 됨을 의미 한다.
가령 히로시마시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이 법안 시행 당시에는 피폭 당시 폭심지(爆 心地)에서 5km이내 혹은 후생대신이 지정한 구역 내에 있었던 사람(직접피폭)과 원폭 투하 후 2주 이내에 폭심지 2km 내의 지역에 들어갔던 사람(입시피폭), 그리고 사체처리 및 구호 등에 종사한 사람(구호피폭) 및 그들의 태아(태아피폭)에게 히바쿠샤의 자격이 주어진 것이 다. ‘기한 내’라 함은 두 도시 모두에서 원폭 투하 후 2주 이내로 결정됐다. 또한 이 중 2호 에 해당하는 입시피폭자는 원폭 투하 당시에는 없었지만 구호나 사체처리, 혹은 가족친지 등을 찾기 위해 원폭투하 후 2주 이내에 폭심지를 중심으로 2km 반경 이내의 구역에 들어 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広島県, 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