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3) 고국에서의 삶
'야미배'를 타고 겨우 귀환한 대부분의 이들에게 고국에서의 삶은 여러 면에서 쉽지 않 았다. 고국의 악화된 경제 사정으로 130만 명이라는 귀환 동포들을 받아들일 사회적 조건이 전혀 형성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환자 중 반은 실업상태에 있었고, 이들에 대한 거 97) 이 일기는 김한수(1918년생)씨가 2011년 5월 12일 면담과정에서 연구자에게 건네준 것이다. A4 용 지에 컴퓨터로 타이핑 작업을 해 작성된 이 일기는 그가 징용 당시에 썼던 일기를 옮긴 것이라고 했다.
원본은 피폭당시 그의 작업장에 있던 아연 가마에 불태워졌고, 두 번째 쓴 것은 1·4후퇴 때 고향 연백 에 두고 왔다고 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바를 쓴 것이지만 지금 쓰라고 해도 그대로 똑같이 써낼 수 있다고 할 만큼 그의 머릿속에 일기 전체의 내용이 각인된 것들이었다.
주나 식량, 취직 알선 등이 일부 구호단체에 의해 지원되기는 했지만 남한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혹독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상태에서 귀환자들이 즉시 안정적인 생활기반 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상남도 미군지방군정부는 귀환자의 상태에 대해 "경제상황 이 일층 심각해지는 속에서 귀환자가 지참한 천 엔만으로는 수일도 생활할 수 없으며, 생계 를 꾸릴 방도도 갖지 못했다"(小林聡明, 2012:68)고 기록했다. 일본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논 과 밭을 미리 많이 사두고 준비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 고 국에서의 생활이었다. 일본에서 돈을 벌어 송금해 모아 놓은 우편저금이 해방 직후 '휴지조 각'이 되어 버리고, 고향 친지에게 맡겨 사둔 땅을 토지개혁으로 잃어 평생 한이 되었다는 사연들이 집중되는 것이 이 해방 직후의 혼란 상 속에서 귀환 동포들이 맞은 고국의 현실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에 보내서 논을 조금씩 사놓으신 게 있었나 봐요. 그래서 그걸 보고 들어 온 거예요. 근데 농지개혁법이 나왔잖아요. 그런 법이 나오니까 우 리가 그 농사를 안 지으면 그게 소작원한테 가게 되니까, 우리가 빨리 들어가서 그 농사를 지어 야 한다 해서 고향으로 들어 간 거예요. 또 아버지 어머니 묘도 거기 있었고요. 저는 하지만 농 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니 바로 부산으로 나왔어요. 일본에서 하던 일이 선박 내연기 기술계통 일 이니까 그런 기술을 살릴 직업을 찾은 거지요. 부산에 올라오니 그 당시 형편없다 아닙니까. 직 장도 제대로 된 것도 없고, 해방 직후니까 질서가 제대로 안 잡혀 있던 시대잖아요. 처음엔 철공 소 같은데 들어갔어요. 여기 부산 범일동 근처일 거예요. 근데 철공소라고 해도 농기계 그런 거 만들고 그랬어요. 그래도 일본에서 하던 일이 있으니까 그런데서 일을 한 거지요. 사실 그때 일 본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한국말이 안 통하고 하니까 직업 구하기가 힘들었던 때에요. (정일봉, 남, 1924년생)
해방되고 나와 가지고 시골 가서 농사짓는다고 했는데, 생전 농사를 지어봤나. 나와서 부산서 3년 살다가 우리 아버지 7촌 아재가 농사를 대신 지어주고 재산을 맡겨놓고 있었는데 그게 자꾸 팔고 이리저리 하니까 그거 찾으러 가야한다고 시골로 들어 간 거야. 대동아전쟁 한참 때는 한 국하고 왕래가 끊겼잖아. 그 사이에 논 댓 마지기 팔아먹고, 우리 고향에 사놓은 네 칸 툇집 사 서 거기 아버지 올 때마다 가져왔던 옷이고 뭐고 다 없어지고 없더라고. 그니까 그 논 찾는다고 시골로 간 거야. 그러니까 처음 와서 부산사범학교 넣어줘서 다니다가 다시 시골로 갔잖아. 졸업 도 못하고 시골로 갔어. 할아버지가 무슨 학교냐고 (못 가게 해서). 그래도 거기서 한국말 배우고 한글도 배우고. 열세 살에 처음 나온 거니까.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를 본거야. 생전 시골을 봤어?
우째 나락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농사지으려니 돼? (이재선, 여, 1933년생)
와서는 당장 고향에 할아버지를 찾아갔대요. 근데 고향이 바닷가 쪽이었는데, 거기서 자리를 잡으셨다고 해요. 근데 아버지가 뱃일을 해본 것도 아니니 배꾼도 못하고 농사일도 해본 적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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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본도 없고 하니 일본 쪽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까 해서 일본에도 한번 다녀오시고 하 셨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도 잘 안되고 그럭저럭 사는데 전쟁이 나고. 그래서 생활자체가 대체로 어려웠어요. 그래서 고기를 잡아오면 그걸 떼다가 안동이라든가 그런 데에 도매하는 그런 일을 하시면서 생활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많은 노력을 하시고요. 어머니가 땔감을 하시면 머리에 이실 줄을 모르니까 메고 다녔는데 그걸 사람들이 흉보고 했다는 이야기도 하시고 그랬어요. 저 는 그때 즈음에 학교를 가는데 말은 한국말을 하는데 그래도 잘하지는 못하고, 또 집에서는 어머 니를 ‘오카짱’이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근데 그게 사람들이 흉보듯이 해서 중학교 가니 어머니가
‘엄마’라 해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서 고생을 했어요. ‘엄마’라고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 말 을 못했어요. (한정호, 남, 1941년생)
또한 위의 여러 증언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교육을 받고 자란 조 선인 1.5세, 2세들이 겪는 사회문화적 어려움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너무나도 분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왜놈 다 됐었던" 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으로의 귀환은 생전 처음 듣고 보는 것들로 가득한 낯선 땅에서의 새출발이었다. 그것은 진학과 취업의 희 망을 접거나 맘속에 담아두던 이와의 이별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이제 '조선 사람', '한국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 거기(고향, 경북 영일) 가서 집이 있습니까, 일터가 있습니까, 먹을 것이 있습니까.….
아이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네. (인터뷰 중 한 동안 말씀을 잇지 못하심) 내가 그래서 차라리 일본에 있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할걸. 나는 아주 일본에서 커놔서 일본 생각이 너무 나는 거예 요. (히로시마에 살 때) 우리 친구들 집에 가면 내가 조선 사람이다 이야기 안하면 모를 정도로 내가 아주 일본 사람으로 살았어요. 그럴 정도로 살았는데, 아이고, 한국 와서 산 생각하면. 근데, 이리 역에 가니까 귀환동포라고 해서 밥도 주고 재워주는 데가 있습디다. 부산에서는 다들 장사 로 우리들을 대해서, 우리도 국밥장사나 하면서 살까 하기도 했는데, 이리에는 그런 데가 있더라 고요. 그때만 해도 눈이 확 뜨이더라고요. 큰 가마솥에다가 쌀밥을 해가지고 퍼서 주는데 참. 그 때 만주에서 온 사람들도 많고. (최성자, 여, 1924년)
나도 사실 그때 해방소식을 들었는데, 일본이 졌다고 하니 얼마나 아쉽던지 눈물도 나고 그 랬어. 중고등학교 진학하고 희망이 컸는데 (박성일, 남, 1932년생)
완전 왜년이지, 왜년으로 살았제.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에 들어올 때도 아무것도 모르고.
(TV에서 가야금 연주 장면이 나올 때 같이 있던 재일교포가 ‘저게 뭐냐’고 묻자, 가야금이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한국사람 다 됐다. (이태순, 여, 1932년생)
시골 큰댁으로 갔지요. 가니까 마당으로 올라서는 축담이 높아요. 거기를 넘어서 방에 가니
문은 또 낮아요. 우리는 애들이니까 들어가는데 키 큰 사람은 숙여서 가야 되는 그런 데에요. 들 어가니 골대로 엮은 자리로 흙바닥을 덮어 놨는데, 그걸 밟으니 먼지가 푹푹 올라와요. 메주 냄새 도 나고, 곰팡이 냄새 비슷하게 나는데, 평생 처음 맡아본 냄새거든요. 머리도 아프고 그러더라구 요...그런데 그때 삼년 흉년 졌다고 그랬었어요. 큰댁이 농사도 좀 있고 했었는데, 주는 게 보리 죽이에요. 평생 하얀 쌀밥만 먹다가 그런 거 주니까 처음에는 못 먹겠더라고요. (김치우, 남, 1935 년생)
고국으로 돌아온 만큼 '한국사람', '조선 사람'이 되어야 했지만, ‘조선말’,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쪽발이'라고 놀림 받기 일쑤였다. 합천에서는 일본에서 귀환한 젊은 처 자들 가운데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워낙 많아, 시집가서 어른들로부터 “혀 짧은 소 리(일본식 한국말) 안 하고 똑똑타”는 얘기 듣는 것이 칭찬일 정도였다. 이처럼 해방 직후 귀환동포들을 맞은 고국의 정치경제적 혼란상과 일본으로부터의 귀환한 이들의 사회문화적 차이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배제로 이어지기도 했다.98)
또한 해방 직후 반도에는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상황도 생각보다 심각했다. 1945 년 12월말 모스크바 3자 정상회담에서 조선의 신탁통치 안이 결정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 해졌다.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들의 귀환 에,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재일조선인들의 일본으로의 재입국 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국으로의 귀환자 수가 크게 감소하고,99) 이미 귀환한 이들 중의 일부가 다시 일본으로의
‘밀항’(密航)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은 고국으로 돌아온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친척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혹은 밀항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는 흔했다. 양점이 98) 한국원폭피해자들이 해방 직후 '원폭' 환자로서 차별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 가 있다. 이와 관련해 연구자는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 '속도 없이 애를 많이 낳았다', '양반 집안인 것만 보고 그냥 시집을 보내던 때다', '(원폭을) 많이 맞은 사람은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많이 당 한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많았는데, 이는 대개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던 시절인 1950년 초반 이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실제 로 연구자가 정리한 호적상에서 일본에서 결혼한 이후 귀환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경우에는 귀국 후에 도 자녀들을 많이 낳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폭의 후장해에 대해 민감해 있던 일본에서 '기형 아' 출산에 대한 우려가 실질적으로 이들의 출산율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면, 한국에서는 적어도 해방 직후 몇 년간 '원폭'의 후유증에 대한 우려는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체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많은 '전재민'이 생겨난 상황에서 '원폭'의 장해가 특별히 취급되는 것은 언론에 서 '원폭'과 '기형아' 등으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상 외상이 없는 '원폭피해자'의 경우 눈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외상이 있더라도 '화상' 환자, '폭격'의 피해자로 여 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차별은 '원폭'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기 보다는 사회경제적/문 화적 측면에서 차별되고 배제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원폭’에 초점이 맞추어져 사회적 차별이 생겨난 시기와 방식/개별적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99) 최영호(1995b)에 따르면 해방직후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빈곤 실정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귀환희망자 의 귀환 포기도 속출해, 센자키와 하카다에서 귀환을 계획한 수의 10분의 1도 채 이뤄지지 않았으며, 1946년 4월부터 12월까지 귀환자가 총 8만여 명으로, 귀환희망자 등록자 중 16.1%에 지나지 않았다 고 보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