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4. 연구의 방법
본 연구는 현지조사와 생애사에 바탕한 구술 채록 그리고 문서 및 문헌 조사를 연구의 주요 방법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자료를 담론 분석의 텍스트로서만이 아니라 경험적 사실로서 인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교차 검토
21
(cross-checking)가 필수적이었으므로 구술 자료와 문서 자료 간에 간극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앞서 선행연구 검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국원폭피해자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자 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얻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편, 다른 많은 사회과학 연구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연구 또한 연 구자의 지위와 성별, 핵 문제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관심사가 조사의 과정과 연구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의 국적과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조사 가 이뤄진 시기에 따라 연구자가 엮어낼 수 있는 혹은 연구자에게 엮이는 조사 결과와 연 구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의 연구 방법을 서 술하는데 있어 본 연구자가 현지조사와 인터뷰, 문헌 및 문서조사를 해나간 계기와 배경, 입장 등을 함께 기록하고자 한다.
1) 현지조사
인류학자의 현지조사는 전통적으로 일정한 지역이나 조직이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거점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여러 주제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에게 현지는 하나의 구체적인 지역이나 조직에만 한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한국원폭피해자와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을 다루려는 본 연구자의 현지조사 또한 조사를 수행한 거점은 있었으 나 이 거점들은 시공간적으로 경계 지워진 어떤 곳이라는 의미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서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기관, 그리고 정책적 측면에서는 서로 다른 수준에서의 상 호 작용 및 관계들 속에서 진행됐다. 특히 한국원폭피해자 관련 일들이 일본 정부 및 일본 시민단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연구자의 현지조사는 물리적으 로 국경을 넘거나 혹은 전자메일이나 인터넷 웹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 는 무엇보다 연구자가 국경과 세대를 넘어선 서로 다른 지역과 조직, 생활세계를 꾸리며 살 아가는 사람들을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주제에 공통적으로 엮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연구자는 이 현지가 어떻게 구성되고 엮어져 나가게 되었는지를 기술 하고자 한다.
연구자는 개인적으로 원자력발전을 포함한 핵문제와 방사능 위험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고, 2011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기 이전에는 적어도 온건한 반핵 반원전 주의적 입장을 취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연구자가 원자폭탄이나 핵무기 등에 대한 반대 와 같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원자폭탄피해자, 정확히는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5년 가을이었다. 연구자는 당시 한국원자력발전 정책의 장에서 환경과 신체에 대한 과학 연구가 정책형성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 ‘피폭’이라는 것은 그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매우 적절한 소재라 여기고 있 었다. 그렇게 해서 연구자는 한국에서 피폭과 방사능 위험과 관련된 실제 사례를 알아보고,
또 이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지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각종 기사를 검 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시 원폭피해자 2세로서 운동을 벌이던 김형률 씨와 한국원폭피해자 2세들에 대한 건강조사보고서 등을 접하게 되었다. 보고서에는 이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유병률이 매우 높은 편이며, 사망률 또한 현저하게 높아서 이들에 대한 보 건당국의 지원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었다. 인권위원회에서 발간 되었던 자료를 읽으면서, 연구자는 처음으로 한국에 현재에도 2000 명이 넘는 원폭피해자가 있으며 그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진행 중에 있음을 알게 되면서 무척 놀 라고 흥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후에 연구자가 현지조사 과정에서 만난 일본시민단 체의 한 회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자기로서는 어떻게 한국 사람들, 그것도 핵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한국의 사회적 배경이 궁금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생 각해보면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들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가 식민통치의 종결 과 해방과 연결되는 상징이었던 것처럼, 연구자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째든 연구자는 원자폭탄 개발이나 원전 반대운동을 기치로 내세운 책을 읽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원자폭탄피해자라고 하는 존재는 멀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수만 명 의 무고한 시민의 죽음, 돌연변이 혹은 백혈병과 관련된 단어들과 연결되는 존재이거나 반 핵운동 단체에서 전시한 사진 속에 비치는 고통스럽고 비참하기까지 한 피해가 신체에 그 대로 드러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연구자에게 원폭피해자는 그런 사진들 속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2007년 1월과 8월 약 두 달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원폭피해자와 관련된 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는 두 번의 예비조사가 될 일본 방문을 위해 일본에서 활 동하고 있는 한국의 원폭피해자 관련 단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기념평화자료 관, 방사성영향연구소 등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담당자에게 전자메일을 보내 방문을 타진 해 답신을 주고받아 가며 이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원폭피해자들 의 피폭체험을 영상으로 담는 작업을 하고 있던 시민운동단체인 한국청년연합(KEYS) 대구 지부 소속 간사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지부 간부, 일본 현 지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모임의 대표자 등의 소개받았다.
2007년 초 일본을 방문해 한국원폭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와 이들이 벌이는 법적 투쟁에 관여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원폭피해자들과의 첫 대면 은 연구자가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상반된 것이었다. 연구자는 당시 한국원폭피해 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소송을 도와주는 일본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처음에 연구자를 환대하며 안내해준 상당히 건강해 보이는 노년의 신사가 자신도 ‘히바쿠샤’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에 만난 다른 피폭자들의 상당수 또한 연 구자가 보기에는 그 연배의 다른 이들과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더욱이 원폭피해자 2세들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인권위의 해석과 발표는 사실
23
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라며 심하게 비난하며 열변을 토하던 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모습 은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첫 번째 현지조사는 이런 당혹스러움 속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이런 복 잡한 감정 속에서 시작된 현지조사의 진행과정은 연구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고 다 양한 사람들과 기관, 조직들과 연계되면서 점점 더 그러한 감정들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이 런 복잡한 심경과 상관없이 현지조사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처음 연구자가 일본의 여 러 단체나 조직, 기관들에 메일을 보냈을 때 대부분은 연구자에게 굉장히 호의적으로 답신 을 해왔으며, 실제로 이들을 만났을 때에도 한국에서 원폭피해에 대한 연구를 하러 온 젊은 연구자가 있다는 것이 반가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많이 피력했고, 현지 생활이 나 일정을 잡는 데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또 한국인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모임과 연 락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인원폭피해자들의 소송이 열 리는 재판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외에 오사카와 후쿠오카가 방문 장소로 추가되었다. 재판이 없는 날이 더 많았으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방사성영향 연구소, 평화기념자료관 등에서 문헌 조사를 주로 하고, 때때로 히로시마 시민회 회원들의 소개로 등산회 같은 모임에 참여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첫 번째 일본에서의 현지 조사 기간 동안 연구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와 관련해 한국에서는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던 갖가지 정보들 속에 노출됐고, 방사능 위험과 관련된 과학연구 및 일본 거주 한 국인/조선인 원폭피해자 현황을 전반적으로 개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일본 방문기간의 예비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두 번째 방문을 시작하기까지는 약 5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동안 한국에서 열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공 탁금에 관한 토론회’, ‘반전반핵동아시아국제대회’, ‘미쯔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항소심 판 결에 따른 재판보고회와 한일청구권협정 파기선언 대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연구자는 이를 통해 공식적인 대회에서 들을 수 있는 발언 이외에 서울 시내를 안내하거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연구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중요한 쟁 점들을 접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이 행사들에서 는 한국의 피폭자단체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초대하여 원폭체험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 거나, 일본에서 온 피폭자들과의 교류회 등을 만들어 이야기를 하는 기회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자는 이런 자리에서 원폭피해자 및 일제시대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소송을 지원 하고 있는 한국인변호사, 한국원폭피해자 단체 전 현직 임원, 히로시마 거주 조선인원폭피 해자연락회 대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의 변호사단과 시민단체 임원, 히로시마 피폭자단체협회 임원 및 일본의 반핵반전평화운동단체 관련 사람들을 만날 수 있 었다. 하지만 연구자는 이러한 모임에서 특별히 인터뷰를 진행하지는 않았으며 일정에 따른 교류회 및 발표대회 등에 참석하고, 행사가 끝나면 서로 얼굴을 익히고 소개하는 자리에서 통성명을 하고, 전체적으로 행사의 분위기나 발언을 기록하는 정도의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