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제도화 과정
2) 사회보장과 국가보상 논쟁 속에서 성립된 원폭특별조치법
원폭의료법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등록된 피폭자 중 '요의료자'에 대한 약간의 의료 서비 스만을 제공한다는 이 조치는 즉각 반발을 일으켰다. 히로시마시나 시의회 그리고 일본피단 협 등은 줄곧 피해자 구호는 '원호'에 기반하고 있어야 하며, 그 실현 방식으로서 의료수당 지급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원폭의료법 시행 4개월 후에 열린 제3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의 ‘일본대표단결의’ 또한 ‘의료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충분’하며 ‘법의 적절한 운용에 의 해 “의료법”의 치료 틀을 확대하고 조기발견, 조기치료를 실시할 것’, ‘“의료법”을 발전시켜 치료중의 생활수호 및 치료를 위한 여비, 영양보급의 보장, 장해연금 등을 설치할 것’, ‘원수 폭사몰자의 유족에 대해 조위금, 생활수단을 잃은 유족에게는 연금의 지급을 입법화할 것’ 등을 국가에 대해 요구해 나갔다 (広島市編, 1983:107). 지방정부들도 원폭피해자들의 목소 리에 힘을 실었다. 원폭의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난 1959년 법 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 이 히로시마 현과 나가사키 현,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로 확대된다. 이들은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시가 중심이 되어 법 개정을 요구하는 '8자협의회'(八者協議会)의 전신인 '히 로시마·나가사키원폭피폭자의료법개정대책위원회'(広島・長崎原爆被爆者医療法改正対策委員 会)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広島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09). 일본피단협 또한 1960 년 12월에 ‘의료의 무료화, 생활곤궁자를 위한 특별원호, 조위금, 사몰자연금 등’의 제 요구 를 가지고 국회청원을 행했다 (伊東, 1975:191).
사실 이 같은 반발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애초에 이 ‘의료법’이 원폭투하와 관련된 ‘국가’ 의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사회보장적 성격’의 것임을 주장하는데서 이미 예견된 것이 었다. 비키니 피재 직후 원폭피해자들이 ‘쿠니’(國), 즉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원폭피폭에 대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일명 ‘동경원폭재판’)은 이 같은 논쟁이 가로지르는 쟁점들을 잘 보여 준다.
당시 원고 측은 소송에서 (1) 원폭투하는 독가스 병기 등의 사용을 금하는 국제법, 헤 이그조약에 위반된다, 2) 국제법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에 서 일본정부가 청구권을 모두 방기했으나 피폭자 개인의 권리를 방기한 것은 아니다, 3) 만 약 개인의 권리를 방기한 것이라면 국가가 권리침해의 손해를 보상할 의무가 생긴다라고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대해 피고인 일본정부는 원폭의 사용은 국제법위반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1) 원폭은 신병기로서 당시는 그 사용 규제를 규정한 실정 국제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국제적인 합의는 성립하지 않았 다, 또한 헤이그조약은 확대해석하지 않는다, 2) 그러한 이유로 원고에게는 가해국이나 가해 자 개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이 없다, 3) 패전국 측으로부터 피해자의 배상청구를 한 전 례는 존재하지 않으며, 원고의 청구는 법률 이전의 추상적인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4) 다 른 일반전쟁피해자와의 균형이나 국가의 재정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48) 등이었다 (広島 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25).
그리고 1963년 12월 이 재판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진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재판부는 원고의 손해배상청구권은 강화조약으로 방기된 것으로서 기각되었으나 원폭의 투하는 국제 법위반이라고 해석했다 (広島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26). 그 이유로는 1) 기존의 국제법규 해석 및 유사적용에 의해 당연히 금지되지 않으면 안됐다는 것, 2) 국제법상 무방 비도시에 무차별폭격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공 격은 무방비도시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점, 3)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의 원폭투하는 전쟁에 있어 불필요한 고통을 주었다는 점, 4) 비인도적인 무기는 적을 해하는 수단으로서 금지되 어야 한다는 국제법상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등을 들었다. 또한 판결에서 국가(피고)의 책임 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49)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생한 경우에는 어느 국가도 되도록 피해를 적게 하고 그 국민을 보 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전쟁재해에 대해서는 당연히 결 과책임에 기반한 국가보상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현재 본건에 관한 것으로서는 ‘원자폭탄피폭
48) 이 일반전재자와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정부에 있어서 이 이후에도 계속 발견된다. 동경원 폭재판의 판결후인 12월 11일 중의원본회의에서 판결의 결과를 받은 피폭자원호를 강화할 계획이 있 는가에 대해 답변한 당시 池田勇人 수상은 “...원자폭탄에 관한 동경지방재판소의 재판관의 발표에 대 해서는....원자폭탄에 대한 피폭자의 의료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설치해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그리고 피폭자, 이른바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중략)...직접피폭을 받은 사람, 모든 관계자에 대해 조치는 전쟁희생자전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제45회 특별국회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 회의록 7호: 根本, 2006:
96 재인용)
49) 昭和三○年(ワ)第二九一四号,昭和三二年(ワ)第四一七七損害賠償請求倂合訴訟事件「判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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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의료등에 관한 법률’이 있지만 그 정도의 것으로는 아무래도 원폭에 의한 피해자에 대한 구 제, 원호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다. 국가는 스스로의 권한과 스스로의 책임으로 개시한 전쟁 에 의해 국민의 다수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상해를 입혀 불행한 생활에 이르게 했다. 그러 나 그 피해의 심대함은 도저히 일반전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피고는 여기에 비춰 충분한 구제 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 다언을 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판소에서 할 일이 아니라 입법부인 국회 및 행정부인 내각에서 결과 를 내놓아야 할 일’이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 국가에 있어서 국가재정상 이것이 불 가능하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 판결이 내려진 다음해인 1964년 3 월 중의원본회의는 <원폭피폭자원호강화에 관한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広島市衛生 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26-7)
동경원폭재판의 판결과 국회에서 의결을 지켜본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 행정당국, 일본피단협 등은 원호법제정을 요구하는 국회청원과 진정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벌여나갔다. 히로시마 시는 1964년 4월 시의회를 중심으로 시의 임원들과 학자 등을 위원으로 한 히로 시마시의회원폭피해자원호강화대책협의회(강대협)를 설치했고(広島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 編, 1996:129), 일본피단협도 재판판결이 나온 12월에 원호법제정을 요구하는 국회청원을 행 했다 (中国新聞社編 1985:190-1).
민간단체인 일본피단협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와 현 등 지방정부도 특별 조치법안을 호소하며, 민관합동 체제가 완성되면서 중앙정부에 피폭자원호대책의 강화추진 을 요구하는 <히로시마나가사키원폭피해자원호대책추진협의회>(약칭, <八者協>)가 발족했다 (広島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33). 이러한 지방자치단체에 의한 진정과 일본피단협 등의 원호법제정운동이 고양되는 것을 배경으로 정부에 의한 ‘원자폭탄피폭자에 대한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이하 원폭특별조치법)안이 1968년 5월 국회에서 성립, 공포됐다.
이 법률은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자가 원자폭탄의 상해작용의 영향 을 받아 지금 특별한 상태에 있게 된 것에 대해 의료특별수당의 지급을 강구함으로써 그 복지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원자폭탄피폭자에대한특별조치에관한법률>(1968년 5월 20일 공 포)
이 원폭특별조치법의 취지를 당시 후생대신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폭탄의 피폭자에 대해서는 ....‘원자폭탄피폭자의의료등에관한법률’에 의해 의료의 급부, 건강진단 등을 행하여 그 건강의 유지 및 향상을 도모하고 있으나, 원자폭탄의 상해작용의 영향 을 받은 사람 중에서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 생활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현재에 질병에 이환되는 등으로 인해 다른 일반국민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지출을 하지 않
을 수 없는 사람 등, 특별한 상태에 놓인 피폭자에 대한 시책으로서 의료의 급부 등의 건강 면에 착목한 대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그 특별한 수요를 만족시키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제58회 일본 통상국회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 회의록 제19호)
이처럼 원폭특별조치법은 원폭의료법이 히바쿠샤들 가운데 발병한 이들을 중심으로 의 료를 행하는 것에 그쳤다면 그에 더해 여러 가지 수당을 제공하는 것이 추가되었다는 점에 서 차이가 있었으나, 두 법은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로 동시에 존재한 것이 특징이 다.50) 원폭특별조치법이 수당과 관련된 만큼 후생성의 원폭피폭자대책관계 예산은 1967년 28억 엔 남짓이던 것이 1968년도에는 43억 6천만 엔으로 1.8배 정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 나 이 원폭특별조치법은 당초 수당지급에 있어 65세 이상이라는 연령제한51)을 두었다 (広島 県環境保健部原爆被爆者対策課編, 1986:249). 또한 원폭특별조치법 수당 수급에 있어서도 소 득제한이 엄격했기 때문에, 수첩을 받고서도 이 수당을 지급받는 사람은 시행 초기에는 전 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피폭자단체나 히로시마 시는 특별조치법에 국가보상으로서의 성격이 전혀 나와 있지 않는 점 등을 들어 이 특별조치법이 자신들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원호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강대협, 일본피단협, 일본원수협 등은 국가 보상적 성격을 가지는 피폭자원호법 제정 운동에 더욱 힘쓰기로 하였다. 1970년에 일 본피단협은 ‘원폭피해자원호법안을 위한 요구골자’를 발표했다 (伊東, 1975). 당시까지의 원 폭피해자 운동에서 내세운 여러 요구의 총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골자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호-쇼-”(三つのほしょう’)52)를 들었다. 이는 (1) 미국의 핵투하, 핵피해은폐, 핵피해 이용, 핵군축경쟁개시의 책임을 규탄하고 일본정부의 전쟁책임, 전후책임을 추급해 피폭자 의 과거의 피해를 보상하게 하는 것 (과거의 보상), (2) 피폭자의 현재 당면한 건강, 생활, 정신적 고통에 대응하는 보장을 할 것 (현재의 보장), (3) 피폭자, 일본국민에 대해 “히로시 마·나가사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ヒロシマ・ナガサキをくりかえさせぬ)는 노력의 보장을 하라는 것 (미래의 보증)이었다. 이 골자를 기본으로 1974년 3월 사회, 공명, 공산, 민사의
50) 특별조치법은 원폭의료법을 계승해 특별수당은 원폭의료법에서 정해진 인정피폭자가, 인정을 받은 질 병이나 상해에 관해 현재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 경우 월액 1만 엔이 지급되는 것이었다 (제2조). 건 강관리수당은 특별피폭자 중 후생대신이 정한 조혈기능장해, 간장기능장해 등의 질병에 관련된 것으로 (1) 65세 이상인 자, (2) 후생대신이 정한 신체상의 장해가 있는 자, (3) 모자세대주 중 해당되는 자에 게 월액 3000엔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제5조) 의료수당은 원폭의료법에서 지급하고 있던 것으로 이후 에는 특별조치법에 기초해 지급되는 것으로 됐다. 개호수당은 인정피폭자 및 특별피폭자가 후생대신이 정한 특정한 질병과 관련해 의사가 개호의 필요를 인정하고 개호를 받는 경우에 지급되는 것이었다.
51) 연령제한은 1971년에는 60세로 낮아졌고, 1972년에는 55세로 완화되었다가 1975년에 완전히 철폐 된다.
52) ‘3개의 호쇼-’는 한자로는 서로 다르지만 일본어에서 동일하게 ‘호쇼-’로 발음되는 보상(補償), 보장 (保障), 보증(保證)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과거와 현재, 미래와 관련된 것으로 적용시켜 요구의 골자를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