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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GHQ와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귀환 정책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26-129)

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1) 해방 후 GHQ와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귀환 정책

많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곧 해방을 의미했고 ‘고국’은 고향 산천과 동포가 있 는 곳이었다. 하지만 해방이 곧 고국으로의 귀환이라는 것은 이 시기 등식(等式)이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가족 중에 부상자가 있는 경우에는 이것이 좀 더 복잡했다. 1988년 일본변호사연합회의 <재한피 87) 이 작품은 1984년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교수(예술철학박사)였던 한국인 홍가이(영문 이름 Kai

Hong)씨가 영어로 쓴 희곡작품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 일본에 있다가 귀국한 한국 여성인 영주 의 비극적 삶을 통해 전쟁의 책임과 반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허구이지만 영주의 일본으 로의 밀항과 이것이 한일양국에서 정치적/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거나 한일의 좌익계열 운동단체들에게 반정부 시위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수습되는 과정은 1968년 한국인원폭피해자 손귀달의 일본 밀입국 사건과 거의 흡사하다 (손귀달 밀항사건에 관한 외교 문서 분석은 김승은(2012a)을 참조할 수 있다.) 연구자가 가지고 있는 대본은 (주) 예음에서 제작된 것으로, 1988년 8월 25일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제 222호로 검열된 인장이 남아 있다. 1985년 국립극장은 연출가 김석만 씨에게 이 작품을 의뢰, 번역을 끝내고 가을 정기공연을 추진했지만 국립극단이 공연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돌연 공연이 취소됐 다. 1986년 작품에 흥미를 갖고 있던 무세중(서울예대) 씨가 작가와 교섭, 김연경 씨 번역으로 테아트 로 巫에 의해서 '히바쿠샤│원폭피해자'라는 제목으로 공연된다 (경향신문 1986/7/8).

폭자문제위원회>는 '재한피폭자들의 고국으로의 귀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당시 보고 서를 작성한 시나 마사에(椎名麻紗枝) 변호사는 '재한'(在韓) 피폭자가 생긴 1차 원인이 왜 이들이 그렇게 일찍−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이 시기는 원폭으로 인한 급성기 장해가 다 끝 나지도 않았을 무렵이다−‘귀국 했는가’ 혹은 ‘귀국해야만 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椎名麻紗枝, 1988:76). 그가 보기에 조선이 해방됐으므로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 갈 기대가 강했다는 것도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원폭증을 앓고 있었을 히바쿠샤들이 부 상당한 몸으로 어떻게 귀환할 수 있었으며, 일본정부는 그와 관련해 어떻게 대응했는가가 문제였다. 시정부의 임시구호소가 폐쇄된 10월 말경부터는 개인들이 부상자를 돌봐야 하는 현실에서, 귀국에 필요한 선박의 알선이나 수속, 가산의 정리 등이 단기간 내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조사는 일본정부가 그들의 귀국수속에 대해 서 보살펴주었다는 예는 '정말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1945 년 말까지 130만 명, 1948년까지 추가로 50만 명의 조선인의 상당수가 자비로 귀환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히바쿠샤들도 마찬가지의 경로를 밟았을 것이라 추 측한다.

그림 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위치

(출처: 구글맵(maps.google.com)에서 연구자가 표기)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의 본국 귀환이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급박하게 이뤄진 것은 GHQ가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일본인 이동은 가능한 한 일본으로부터의 조선인 송환과 조 화시켜야 한다"(미 국무성 비밀외교문서, 1984:91 이현주, 2005:253-254 재인용)는 입장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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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GHQ의 재일조선인 그리고 재조일본인의 귀환 정책은 양국의 사 회 및 경제에 대한 우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총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있었던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모국 귀환은 재조일본인의 히키아게(引き揚げ, 인양 혹은 송 환)를 원활히 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용욱(2005)의 「일본 내 한인의 '귀환'과 한국 내 일본 인의 '송환'에 관한 해방 직전 미국 측 자료88)」해제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귀환 문제는 1943년부터 미국을 포함한 열강들 사이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89) 소위원회는 전후 일본과 한국의 경제 및 안보 상황에 따라 이 귀환문제 가 다루어져야 하며, 특히 조선 내 일본인의 잔류는 최소화해야 하고, 이것은 일본에서의 조선으로의 조선인 귀환으로 완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시나 마사에 변호사의 보고서 결론 에도 인용되고 있는 일본의 패전 직후 GHQ의 점령정책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본에 있어 서의 조선 소수민족, 1904-1950』(日本における朝鮮少数民族, 1904-1950)(Wagner, 1975)에 서도 GHQ와 일본정부의 조선인 귀환 조치가 서둘러진 이유에 대한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 이 시기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합법화된 조선인들의 (좌익 계열의) 민주화 운동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진 것에 대해서 일본정부나 점령군의 우려가 커지면서 조선인의 고국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 조치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일본에서는 GHQ, 한국에서는 미군정 기였던 1945년 8월부터 1948년까지 점령군의 월경에 관한 정책을 검토한 고바야시 소메이 (小林聡明, 2012:68)는 당시 GHQ가 일본정부에 조선인이나 중국인 중 복원군인이나 강제연 행자를 우선하고, 늦어도 11월 14일부터 하루 1000명 정도씩을 센자키(仙崎)나 하카다(博多), 쿠레(呉)로부터 귀환하도록 지시했다는 정부 문서를 통해 이러한 조치들의 구체적인 실행 방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5년 11월 이후 GHQ에 의한 귀환대책이 본격화되어 귀환선이 정기적으로 운항됐고, 이후로도 일본에 계속 남아 있으려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사실상 강제 적으로 귀국을 추진하는 등의 일이 계속 진행됐다.90) 1945년 말 센자키나 시모노세키(下関)

88) 미국국립문서보관소 <RG59, Records Relating to Miscellaneous Policy Committees 1940-45, Box No. 108> 내에 보관 중인 미국 행정부 내 삼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on committee) 산하 극동지역분과조정위원회(The Inter-Divisional Area Committee on the Far East) 가 작성한 일본 내 한인의 '귀환'과 한국내 일본인의 '송환'에 관한 문건 (K-7 Preliminary, 'Korea:

Repatriation of Koreans in Japan', 1945.4.25; K-9 Preliminary a, 'Korean: Repatriation of Japanese Residents in Korea', 1945.6.1)의 자료 해제.

89) 1944년 삼부조정위원회와 전후계획위원회(Post-War Programs Committee)를 중심으로 미국의 한국 문제에 대한 전략적, 정치적 처리방안이 논의됐고, 1945년 3월에 종전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 귀환 문 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됐다. 이러한 정책적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1945년 극동지역분과조정위원회 한국 소위원회에서는 재일 한인의 귀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이 소위원회는 종전 후 많은 한 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귀환할 것을 예상하기는 했으나, 일본의 경제 상황과 조선인의 동화 정도가 약해 일본인들이 적대시할 소수 종족집단이 될 것을 우려해 '일본 국적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한인을 송환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조용욱, 2005:249).

90) 실제로 1946년 1월 12일의 GHQ는 GHQ의 계획 따라 귀환 명단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는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소지할 수 없게 한다는 성명을 냈는데, 시나 마사에(椎名麻紗枝) 변호사는 이것이 조선인 을 강제적으로 귀국시키고자 하는 방침이라고 평가했다 (椎名麻紗枝, 1988).

등에 2만 명, 하카다(博多)에는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귀환을 기다리며 체류해 위생상태도 극도로 악화되었다.91) 그 중에서도 “시모노세키는 생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 되고 있었다고 보고된다 (小林聡明, 2012:67).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귀환 과정에 대한 구술에서 이 시기가 “초가지붕에 서리를 맞아서 잎은 다 마른 하얀 박이 남아있었다”(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김치우 증언편)거나 “들어가 서 곧 김장 김치를 담그고, 동지팥죽을 끓였다”(최순례 증언편)고 기억되는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이었다는 점92)은 이들의 이주가 GHQ의 일본 점령 기간 동안의 조선인의 월경에 관 한 정책 차원의 대책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이것은 패전 직후 일본의 원폭피 해자들이 다른 일반의 전재민과 동일한 범주로 엮였던 사정을 비추어보아도 충분히 짐작가 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고국으로 귀환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귀환 동포들 또한 원폭피 해자로서 특별한 대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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