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1) 보상청구운동의 좌절과 수첩 재판으로의 전환
본 절에서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장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은 일련의 소송들의 결과와 그 의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원폭피해자들 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일련의 소송들이 한국원폭피해자운동의 역사에서 갖는 성격을 우선 고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3-1절에서 인용한 부산지역의 여성원폭피해자들이 일본정부 에 피폭자건강수첩 발급 문제를 실질적인 문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한 요구는, 국내법 제정 을 통한 보상과 일본의 인도적 지원을 요구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 소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당시 그 행위는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대정부 혹은 대일본 요망 서를 전달해온 원폭협회의 주요 활동 궤적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예외적인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단독 행위였다. 그리고 이 단독 행위는 위 소송들 가운데 한국원폭피해자 협회 회원 거의 대부분이 제기한 ‘402호 통달 위자료청구소송’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송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1978년 손진두 소송의 최고재판소 승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협회는 자국 정부와 일본 정 부를 압박해 일본 정부가 외국인 피폭자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 한국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을 개진하는 등 기존에 해온 운동의 방식을 변경하지 않 았다.138) 실제로 당시 협회 임원들은 수첩 교부를 통한 일본의 국내 원폭2법의 적용보다는 대정부 진정 활동을 통해 한국원폭피해자 구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도 강했고, 손진두 소송의 최종심까지 승소판결을 받은 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컸다 (정근식 편·진주 채록 (2005) 서석우 증언 편 참조). 그러나 대정부 진정과 양국 정부에 대한 협회와 일본 시민단 체들의 압박은 10·26사태로부터 시작해 이후 지속된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다시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일본 정부가 제안했던 세 가지 방안 중 1) 한국 의사의 일본파견 2) 일본 의사의 한국 파견 등이 제외되고 도일치료만이 유일하게 남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 138) 4월 1일 협회는 이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의 요지는 1) 손진두 원폭수첩재판은 손씨 개 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피폭자와 일본정부와의 쟁의다, 2) 이번 승소로 일본정부가 지금까지 적극 회 피하려고 했던 한국인피폭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국가책임이 확정된 것으로 본다, 3) 차제에 법적 투쟁 을 한 손진두씨와 그를 지원한 일본시민단체에 사의를 표한다, 4) 일본최고재판의 판결은 일본인의 양 심이 살아있다는 증거로서 경의를 표한다, 5) 일본정부는 외국인 피폭자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해 모든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치바 준코(2003), 김승은(2012a, 2012b) 참조).
물론 이 시기에도 일본에 건너가 치료나 운동 차원에서 수첩을 받는 협회 임원들이 없 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원폭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임시적인 치료와 운동의 방편 중 하나였다. 이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문제가 일본의 국가적 책임에 따른 보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원폭피해자 문제를 일본의 국가적 책임 인정과 그에 따른 보상의 문제로 보는 협회 의 입장은 1980년대 후반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가장 역점을 두어 진행한 23억 달러 보상 청구 운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87년 11월, 전후 미처리 문제 해결 등을 촉구하는 한일 양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도일 치료 중단 등을 계기로 일본 정부 에 대하여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며 그 보상책임을 묻는 23 억 달러 보상청구를 제기하게 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989).
당시 이 보상청구운동은 일본변호사협회 및 <시민회의>, <시민회> 등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과 한국에서의 고양된 일제 피해자 보상 여론과 함께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민 주화 이후의 여타 대일보상청구운동과 때를 같이해 미디어에서도 원폭피해자 관련 소식이 연일 오르내렸고, 협회는 대선정국에서 여야 대선주자들을 찾아 자신들의 요구를 압박해나 갔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그 방문의 결과가 나 온 시기는 언론을 통해 한국에서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가 가장 활발하게 보도되고, 한국원 폭피해자들 사이에서도 대사회적으로 가장 격렬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때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보상요구는 한일 양국 정부의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피폭자에게 ‘원조’를 하는 형식으로 변형되었고, 한국피폭자 원 조를 위한 지원금의 액수 또한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요구한 금액의 1% 정도에 해당하는 40억 엔에 그친다. 일본 외무성에서 국제거출명목으로 계상된 이 돈은 원조라는 성격상 한 국의 구호단체인 대한적십자사에 송금되었고, 그 운용은 협회 등과 협의하는 것으로 결정된 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임원 및 회원들은 크게 낙담하고, 이에 반발해 40억 엔에 대하여 수령 거부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이 돈은 1991년과 1993년 두 차례 에 걸쳐 대한적십자사로 보내진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관되게 요구해 온 보상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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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억불 청구 관련 대외무부 요망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일본정부에 대한 23억불 요구를 외교문제로 상정시켜 주실 것
2. 한일회담때 청구권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인도적 입장에서 무엇인가 해주겠다고 일본 측이 수차 말한 것을 실행에 옮기라고 촉구할 것
3.원폭병원 건립, 센터건립 등 그 후 추진상황 촉구
4. 한국 원폭피해자 방치문제가 일본국간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한일우호관계에도 지장을 준다는 걸 강조해 주실 것
5.우리 정부가 정식으로 요청하시기 난처하시거든 원폭협회가 비공식 교섭토록 측면 지원해 주 실 것
6.피폭자가 자비로 치료차 도일할 때 치료비자로 여권을 발급해 주실 것
7. 도일치료 한 가지만 가지고 일본이 생색을 내는데 도일치료는 극히 일부대책에 지나지 않으 니 근본대책을 세우도록 고자세로 나와 주실 것
8.한국 국내에서의 피폭자 치료비를 일본 측이 전액 부담하여 줄 것
9. 최근 대만인 원일본군인에 대한 위자료 지급문제가 일본국회에서 전향적으로 논의되는 이때 에 한국피해자 문제는 대만군인문제 이상으로 진지하게 토의되어야 한다는 점 강조
10. 도일치료 재개할 때 지금 같은 표시효과만 노리지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해 주도록 할 것을 일본 측에 촉구 도일치료여비 등 일체를 일본 측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주실 것
피해보상액 산출내역서
1.소화59년도(1984년도)히로시마 시 위생국 발행 원폭피폭자 대책사업개요에 의거함
2.상동 책자 제170항,예산상황 중 소화 59년도 후생성 예산액 99,171,068,000엔을 기준으로 함 3.상동 책자 예산액 중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은 예산기준에 계상치 아니함.
4.전국피폭자건강수첩소지자수(1984년 3월 31일 현재) 368,259명 ---
1.소화59년도 후생선 예산액 99,171,068,000엔
2.피폭자 1인당 1년예산액 269,297엔 (99,171,068,000/368,259) 3.해방 후 42년간 1인당 예산 11,310,474엔(269,297*42년)
4.한국피폭자 23,000명에 대한 총액 260,140,902,000엔(11,310,474*23,000) 5.총금액을 달러로 환산한 액수 1,858,149,300불(260,140,902,000/140불) 6.향후 10년간 추가예산 442,416,500불(269,297*23,000*10/140불) 7.총액 2,300,665,800불(23억불)
표 1 23억 달러 보상 청구 요망서와 보상액 산출 내역서
한편 ‘수첩’ 재판을 통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운동은 한국원폭피해자와 일본 시민단체간 의 연대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소위 '소송을 통한 운동'이 본격화된 1990 년대 후반까지 일본 <시민회>의 한국원폭피해자와의 연대는, 설립 당시부터 1980년대 중반
까지는 기부금 후원과 한국원폭피해자 일본 초청 등을 통한 홍보와 교류,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원폭피해자 도일치료 시 피폭자건강수첩 교부 신청과 치료기간 동안 필요 한 각종 지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히로시마도일치료위원회>와 일본 <시민회>의 활 동이 한 예다. 이들은 단체가 설립된 1972년 이래 한국에서 치료의 길이 없는 한국원폭피해 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치료를 돕는 일을 해왔다. 물론 설립 초창기에는 한국원폭피해자협 회에 사무실 운영 등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지만,139) 한국원폭피해자의 도일치료가 제도적 차원에서 중단될 위기에 처한 1984년부터는 단체 차원에서 한국원폭피해자 초청 도 일 치료를 정례화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원폭피해자 초청에 따르는 각종 출입국 수속 문제 까지 포함해 일본에서의 입원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종 물품과 일시 체류지, 통역 등을 제공하고, 피폭자건강수첩을 신청할 때 필요한 증인을 찾아주는 등 한국원폭피해자들 이 일본의 영역 안에서 히바쿠샤로 있을 수 있는 동안 받을 수 있는 각종 경제적, 의료적 지원의 수속과 체재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도 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을 제외한다면, <시민회>와 <히로시마도일치료위 원회>의 한국원폭피해자 지원 활동은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있어 히바쿠샤가 되는 데 있어 중요한 가교가 된 것이다. 아래의 표3은 그 중 <히로시마도일치료위원회>를 통해 도일 치 료를 받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표3에서 볼 수 있듯이 '402호 통달' 조치와 관련된 일련의 소송들이 승소 판결을 받고, 일본의 영역 안팎을 가르는 경계가 히바쿠샤들에게 주어지는 제도적 지원에서 큰 차이가 없어진 오늘날 도일치료는 숫자면에서 크게 줄었다. 도일치료 대신 일본 <시민회>는 앞의 3-3절에서 인용한 내용처럼,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 내에서 여전히 겪고 있는 차별적 대우들을 철폐하기 위한 소송들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냈고, 현재도 지원하 고 있는 중이다.
연도 기부금액 연도 기부금액 연도 기부금액
1973 1,416,912 1978 10,000 1983 2,578,673 1974 2,017,892 1979 260,240 1984 1,566,796
1975 2,375,761 1980 81,000 1985 737,600
1976 1,931,758 1981 - 1986 1,381,965
1977 303,103 1982 1,043,712 총계 15,705,412 표 2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록에 남아 있는 <시민회> 기부액
139) <시민회>가 결성된 1972년 이후 꾸준히 기부금이 도착했고, 1984년부터는 <히로시마도일치료위원 회> 쪽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졌다. 이미 언급했듯이 두 단체는 중복 활동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