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한국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범주로의 편입 과정
1) 회원과 히바쿠샤의 간극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비키니 피재로 방사능 피폭의 위험에 대한 사회 적 여론이 고양되고, 그것이 1958년 원폭의료법의 제정으로 이어져 히바쿠샤 구호가 제도화 되기 시작했다. 연구자는 여기에서 원폭의료법 제정 이후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상해에 대한 구호와 보상이 국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적극적 혹은 소극적 인 식142) 이 피폭자건강수첩을 받아 히바쿠샤가 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을 비교 사례 로 삼아 한국 사회에서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구호와 보상 문제가 어떤 독특한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원폭의료법이 시행된 첫해 나가사키에서는 1957년 66,782명이, 히로시마 시에서는 1961 년까지 87,752명이 수첩을 교부 받았다. 아래 그림 2는 이후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에 서 신규로 수첩을 교부 받은 이들의 숫자를 표기한 것이다.143)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수첩을 교부 받는 수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확연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중간 중 간 급격하게 수첩 교부수가 증가하는 구간들이 있다. 그런데 그 증가폭은 대체로 원폭의료 법 시행에 따른 각종 행정 규칙과 규정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 2의 그래프 중에 대표적으로 증가폭이 큰 네 개의 구간이 있는데, 이 중 첫 번째 구간인 1962-63년은 1960년 도입된 특별피폭자제도(3장 3-2절 참조)에서 특별피폭자 인정 자격이 직 접피폭자에서 입시피폭자까지 확대되고, 공간적 측면에서는 폭심지 2km에서 3km로 완화되 며, 또한 소득에 따른 수당 제한도 폐지된 때였다 (広島市衛生局原爆被害対策部編, 1996:109;
142) 어떠한 정부의 구호나 보상에 대해 개인이 그에 응하지 않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 예를 들어 사회 적 낙인에 대한 우려와 같은 개인적 동기 혹은 그러한 보상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 등의 경제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원폭피해자구호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원폭피해자라고 해서 모두 가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받는 것은 아니며,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본 절에서 주목하 는 것은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를 제약하거나 혹은 추동하는 제도적/사회적 수준의 이유를 검토하고,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에게 갖는 의미이다. 또한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이 1970년대를 정점 으로 피폭자건강수첩을 적극적으로 교부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당시 이들이 자신이 ‘히바쿠샤’임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거나 사회적 낙인이 없었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원폭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수첩을 교부받는다는 사실은 대개 본인 과 일부 가족들에 한정해 알고 있고, 외부로는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143)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는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할 수 있는 여러 지방정부 중의 하나다. 따라 서 이 숫자가 일본의 전체 '피폭자건강수첩' 교부 수는 아니며, 사례 비교를 위해 가장 주요한 곳으로 서 두 도시의 데이터를 이용했다.
- 175 - 被爆者援護法令研究会,2003).
<그림 2>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의 피폭자건강수첩교부 현황
* 나가사키 시는 1957년 66,782명, 히로시마 시는 1961년까지 87,752명이 가입. 차트에서는 신규 가입 자만 표시. (데이터 출처: 広島市健康福祉局原爆被害対策部,2008, 『原爆被爆者対策事業概要』.p.63;
長崎市原爆被爆対策部,2011,『原爆被爆者対策事業概要』.p.17. 연구자 작성)
두 번째로 증가폭이 큰 구간인 1966-68년은 1963년 동경원폭소송의 재판 결과(2장 3-2절 참조) 국가 보상에 의한 피폭자원호법 제정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원폭특별조치법 제정 으로 그 성과가 이어진 때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동경원폭소송 재판 결과가 나온 이듬해인 1964년 소련의 핵실험에 대한 입장 차로 분열된 구사회당과 공산당 계열의 피폭자단체가 각자 조직을 추스르고 1966년 다시 운동을 재개하고 활발하게 회원을 모으던 때라는 점이다 (根本, 2006:97). Yoneyama(1999:92-96)가 일본의 반핵 운동의 흐름 속에서 원 폭생존자들이 히바쿠샤라는 하나의 단일하고 강력한 정치적 의지와 열망을 가진 정치 주체 로 내세워지고, 그것이 피폭자건강수첩을 받아 히바쿠샤로 인증되는 제도적 절차와 결합했 다고 진단한 시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 구간인 1971-72년 시기는 원폭특별조치법에 따라 의료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는 연령 제한이 각각 60세와 55세로 완화되고, 피폭 지역 또한 확대되던 때이다. 히로시마 시 에서는 시외의 행정단위들이 속속 추가됐고(3장 3-2절 참조), 나가사키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역이 확대됐다. 앞의 구간들에 비해 증가폭은 적어졌지만, 히바쿠샤들에 대한 수당 지급 연령 제한이 완전히 폐지되고, 특별피폭자제도가 없어진 1974년 10월에도 수첩 교부자가 크 게 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수첩 교부 증가폭은 감소세를 보이다가 나가사키는 2005년 이후 100명 이하로, 히로시마시도 100명 정도의 선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신규가입
자는 2003년 402호 통달이 폐지된 이후 재외피폭자들의 신규가입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들의 신규 수첩 교부 수는 거의 의미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 다.
요컨대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의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는 한편으로는 제도적 지원 수준 과 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나 제약이 완화되는 것에 따라 실제로 지원 대상이 되는 이들이 지원을 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의 흐름 속 에서 강력한 정치적 주체로 부각된 히바쿠샤 단체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추동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의 원폭피해자들이 수첩을 교부받아 히바쿠샤로서 제도적 지원을 받은 수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정점을 이뤘다.
그에 반하여, 원폭 이후 심각한 외상을 입은 이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병을 문둥병이 나 귀신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외상이 없이 그저 몸이 약하다고만 생각했던 많 은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에게 같은 시기는 자신들의 신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것을 치 료하거나 구호할 어떤 방도가 있는지, 어떤 제도적 지원이 가능한지, 그와 관련해 어떤 개 인적 결단을 내려야하는 것인지 알 수조차 없는 시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4장 2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기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국 사회는 원폭피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있 어도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의료적 진단을 할 사람도, 지식도, 그리고 제도적 지원도 없는 곳이었다. 이런 시기에 한국의 개별 원폭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구호를 위해 어떤 제도적 방 편을 모색하는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 원폭피해자라는 자각을 하면서 시작되고, 그런 자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라는 조직과 연결되면서부터다. 원폭3법의 제 정에 따라 일찍부터 자국 정부가 원폭피해자 구호와 보상에 대한 주체로 나서고, 그 대상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수첩을 교부받아 히바쿠샤가 되었던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한국원폭 피해자협회라는 자조적(自助的) 결사체가 자신들의 권리 성취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 투쟁의 주체임과 동시에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원폭피해자 구호단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1967년 설립된 이후 한국에서는 원폭피해자들의 자조(自助) 조직 으로서 원폭피해자의 구호 등과 관련된 정보와 지원이 모이는 거의 유일한 거점이었다. 일 본에서 거출된 40억 엔의 피폭자복지기금이 운영되기 전에는 아주 적은 액수라 하더라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구호와 지원 물품이 도착하는 곳이었고, 그것의 배분을 결정하는 의사결 정조직이었으며, 민간 의료 기관 등에서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진 치료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협회의 회원이 되어야 했다.144) 1990년대 일본정부에서 거출된 40억 엔의 집행은 대한적십 자사에게 맡겨졌지만, 이 기금으로부터 지원되는 의료비는 협회 회원으로서 적십자사에 등 록된 원폭피해자라야 했다. 이것은 비록 보상과 구호의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2003년까지 한국의 개별 원폭피해자들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회원이 되어야만 그 대상이 될 수 있었 144)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록에는 설립된 이후 서울시가 회원들의 생계 지원을 위해 밀가루 등의 물품을
지원했다거나 일본에서 도착한 구호금 내역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참조.
- 177 -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혹은 그 하부 조직으로서 지역별 지부145)는 그 같은 경제적/의료적 혜택을 얻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피폭자가 뭔지도 모르는 한국”에서 협회는 이들에게 필요한 일본의 사정을 듣고 관련된 정보를 얻으며, 그것의 현실 적 실행의 형태가 “결국 그게 뭐하자는 소리인지”를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 본의 사정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 원폭피해자들에게 협회, 그리고 이의 지역 하부 조직인 지부는 자신들과 관련된 정치사회적 쟁점이나 제도적 지원 등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많은 경우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히 바쿠샤의 경계 넘기는 이 협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물론 4장 2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본 시민사회 단체와의 연대나 친인척 연줄망에 기반해 일본과 연결되어 있는 특 별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또한 오랫동안 협회나 지부와 별개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개별 원폭피해자들의 히바쿠샤의 경계 넘기의 시기와 방식은 이들의 협회 가입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