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1) 일본에서 ‘자이칸히바쿠샤’에 대한 지원의 사회문화적 배경
한국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공식적인 대외 활동은 정치사회적 제약 속에 고립됐고, 당연히 사회적 환기라는 측면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원폭피해자 들의 활동에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시민사회였다. 그런데 앞으로 좀 더 설명되겠지 만 일본에서 자이칸히바쿠샤로 불린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존재에 대해 일본의 시민운동 진 영이 주목하고 이들 사이에 교류 혹은 연줄망이 만들어진 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이른바 손 진두 소송(1972년)이라는 사건113) 이전에 이러한 사건들을 만들어낸 두터운 사회문화적 요 소들이 있다.
우선 시기적으로도 한국원폭피해자들과 일본 시민사회 사이의 연결은 한국원폭피해자협 회라는 공식적인 조직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였으며, 연결지점이라는 측면에서도 협회라는 조직이나 단체 간의 공식적인 채널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많았다. 한국원폭피해자 를 지원해온 일본의 시민들이나 활동가들의 지원 계기로부터 설명을 시작해보겠다.
히로시마에서 오랫동안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온 히라오카(平岡 敬) 전 히로시마시장114)의 인연은 조선으로부터의 '히키아게샤'(引揚者)115)로서의 개인사를 반영하고 있다. 1927년 오사카에서 출생한 히라오카 씨는 부모의 고향이 히로시마였는데, 1934년 가족의 사업 관계상 식민지 조선이었던 지금의 북한 선봉, 흥남, 서울 등지에서 소 학교 일부와 중학 시절을 보냈다. 조선에 가기 전에는 후일 히로시마의 폭심지가 된 혼가와 소학교(本川小學校)에 1년 정도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패전 후 귀국해서 이곳의 동급생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원폭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후 이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생활 그리고 히로시마의 지역 주재 기자로서 반핵평화운동에 관 심을 가진 진보 성향의 그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자이칸히바쿠샤문제로 연결될 잠재력을 가 지고 있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1964년 한국으로부터 도착한 편지였다. 마산의 국립병원에 폐결핵으로 입원한 박수암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온 그 편지는 한국원폭피해자의 실태와 구 호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편지를 받고 한일회담을 즈음해 한국을 방문해 처음으 113) 손귀달은 밀항 직후 체포되었다가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송환 조치되었는데, 이 사건이 일 본의 시민사회에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를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 되면서, 뒤이어 이어진 손진두의 밀항은 그 누이 때와 달리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만들어 내면서 재한피폭자구호라는 운동적 차원 으로 전환되어 갔다. 특히 손진두의 밀항은 현재 한국원폭피해자운동의 역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 으로 인용된다. 손귀달과 손진두 소송과 관련해서는 이치바 준코(2003), 그리고 사건 일지와 이에 대 한 한일 양국의 외교 교섭 태도에 대해서는 김승은, 2012a, 「재한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의 인식과 교섭태도(1965~1980)」,『아세아연구』 제55권 2호 pp.104-135를 참조.
114)『쥬코쿠신문』홈페이지 인물 인터뷰 기사 참조 (http://www.chugoku-np.co.jp/kikaku/ikite
115) 일본제국주의 시절 군인과 군속을 포함해 약 700여만 명의 일본인이 조선과 만주, 중국 대륙 등에 진출했는데, 패전에 따라 이들은 모두 본국으로 송환된다. 이들 가운데 군인과 군속의 귀환은 대개 '복 원'(復員)이라 하고, 식민지에 생활근거지를 가지고 있다가 귀환한 이들을 '인양자'(引揚者) 즉 일본어로 '히키아게샤'로 지칭한다. 여기에서는 일본어 발음대로 '히키아게샤'로 통칭한다.
로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만날 것을 계획하게 된다. 짧은 취재기간이었지만 그는 서울과 부산 에서 아홉 명의 자이칸히바쿠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그때 그들이 참으로 비참한 상황 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정말 늦은 것이었음 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일본인은 역시 피폭한국인, 피폭조선인의 문제를 잊고 있었거 나 혹은 무시하고 원폭피해의 문제를 이야기해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면서도 유일 피폭국이라고 하는 또는 피폭국민이라는 입장에서 평화를 호소해온 것을 겨우 알아차린 것 이다. 더욱이 당시는 전후 20년이 다 되어 가는 때였던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平岡敬, 1988:10-12).
일본에 돌아온 히라오카씨는 그해 11월 25일부터 『쥬코쿠신문』(中国新聞) 조간 1면에
「이웃나라 한국」(隣の国 韓国)이라는 제목으로 10회의 연재기사를 실었다. "한국 전쟁의 상처 자국이 여전히 생생한 전시체제 하에서 사는 서민의 모습을 전하고 빈궁의 수렁에 빠 져 있는 '자이칸히바쿠샤'의 존재와 지원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이 기사를 가필한 「한국의 원폭피재자를 방문하고」(韓国の原爆被災者を訪ねて)를 잡지
『세까이』(世界) 1966년 4월호, 그리고 단행본『증언은 사라지지 않는다』(証言は消えない) (未来社刊, 1966)에 발표한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원폭피해자와의 인연은 이후 손진두씨 수첩 재판 지원 등으로 이어 진다.116) 1970년 12월 부산에 거주하던 손진두가 사가 현으로 밀입국해 체포되었다는 기사 를 읽고 곧장 그를 면회하러간 히라오카 씨는 손진두의 사진을 찍어 그가 피폭 당시 살고 있었다고 하는 히로시마 시 미나미간온마치(南觀音町)로 달려가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히로 시마대학의 학생들에게 강제송환반대 투쟁을 부탁하고, 히로시마의 젊은 의사들에게 손진두 씨의 건강 진단을 의뢰한다. 이때 <손진두를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가 결성된다. 1972년 손 진두씨의 피폭자건강수첩 교부취소청구소송이 시작됐을 때 히라오카 씨는 당시 이 소송과 관련된 후생성, 법무성과의 교섭을 친구이자 같은 프리랜서 언론인 동료였던 나카지마 타츠 미(中島龍美) 씨에게 부탁하고, 그 자신은 재판을 지원해줄 변호사를 물색하고 비용 등을 모 금하러 다녔다. 그는 이후에도 반핵평화운동과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 히 취재했고, 쥬고쿠신문 사장을 거쳐 1990년대에는 8년간 히로시마 시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그러한 관심은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연구자가 2012년 히로시마평화기념식전을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117)
116)『쥬코쿠신문』홈페이지 인물 인터뷰 기사 참조 (前広島市長 平岡敬さん(1927年~)<9>在韓被爆者 取材-日本人の責任見つめる(2009年10月14日) (http://www.chugoku-np.co.jp/kikaku/ikite/)
117) 히라오카 씨는 보수색이 짙은 히로시마의 지역색에도 불구하고 1991년 보수 분열에 의한 후보자 난 립 속에서 진보적 성향의 인물로 히로시마시장에 첫 당선, 1995년에 재선 1999년까지 2기 8년 동안 재직하면서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왔다 (위의『쥬코쿠신문』홈페이지 인물 인터 뷰 기사 참조). 2012년 8월 연구자가 히로시마에 방문했을 당시는 '원폭연구의 남아 있는 문제'라는 주 제로 제37회 히로시마대학평화과학심포지움이 열리고 있었는데, 히라오카 씨는 여기에서 '한국피폭자 문제를 돌아보며'(韓国人被爆者問題を振り返って)라는 제목의 기조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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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히로시마에서 한국원폭피해자의 도일치료를 지원하고 있는 히로시마 가와무라(河村) 병원의 초대원장인 가와무라 토라타로(河村虎太郞)씨도 히키아게샤 였다. 식민지 시절 서울에서 경성제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히로시마에서 내과 병 원을 운영하고 있던 그는 1971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방문한 일본 <오리츠르회>(折り鶴 の会)118)의 활동을 통해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처음 접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히로시마 에서 <한국원폭피해자구원한일협의회>(이하 <한일협의회>로 약칭)를 결성한 뒤 지인인 의 사 세 명과 함께 <속죄의 의료단>(贖罪の医療団)을 꾸려 1971년 9월 일본인 의사로서는 처 음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원폭피해자들에 대한 건강검진과 진료를 실시했고, 72년도에도 같은 사업을 위해 방한한다.119) 그리고 이 방문을 계기로 그는 일본 <핵금회의> 히로시마 지부와 함께 합천에 원폭피해자진료소 건립에 의료적 지원을 시작하고, 1974년에는 일본기 독교단 중부교구와 함께 <재히로시마한국인·조선인피폭자구원회>를 발족시킨다.120) 이 모임 은 1974년에는 성금을 모아 피폭자지원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재한국원폭피폭자 를 히로시마로 초청하는 운동> 그리고 이어서 <재한피폭자도일치료히로시마위원회>(이하
<도일치료위원회>로 약칭)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가와무라병원은 도일치료위원회에서 초청 한 한국원폭피해자를 직접 입원시켜 진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히로시마 내의 여러 원폭전문 병원을 섭외해주는 역할도 했으며, 이러한 사업은 그의 아들이 2대 원장으로 취임해 병원을 물려받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153-155). 한 편 손진두 씨의 소송을 계기로 <재한피폭자를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 (약칭 <시민회>)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나카지마 타츠미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서 시민 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2008년 1월에 사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해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가지마 타츠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히라오카 전 시장의 지인으로서, 그녀가 자이칸히바쿠샤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은 한일조약 체결 직후였 다. 한일조약 체결 직전에 한국에서 관광비자로 일본을 방문한 한 한국인원폭피해자가 쥬고 쿠신문 히라오카의 협력으로 (자신의 원폭 피해 사실을 증명해줄) 증인을 찾아 원폭수첩을 받아 히로시마시민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 그 한국인원폭피해자는 오사카를 경유해 동경의 한 결핵전문병원으로 옮겨갔는데, 비자기간이 만료되어 일본 체재가 불법체류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입국관리소가 퇴원 즉시 강제송환을 명하는 상황에서, 법무성대신에게 호소편
118) 오리츠르회는 히로시마원폭희생자2세 여학생으로 구성된 단체로서, 심각한 원폭장해에 시달리던 사 사키라는 소녀가 '학'을 1000마리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신념으로 죽어가면서 학을 접다가 미처 다 접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이를 기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사업을 위해 만들어 진 단체다. 사사키 소녀의 이야기는 이 오리츠르회의 결성 계기뿐만 아니라 원폭피해자위령비에 놓인 종이학들의 유래가 된 것이기도 하다.
119) 한국원폭피해자협회(2011:131) 기록에 따르면 1971년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15일간 서울에 서 70명, 부산에서 65명, 합천보건소에서 117명 등 모두 252명을 진료했다.
120) 가와무라씨가 일본기독교단 중부교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 자신이 이 교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