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2) 고국으로의 귀환
등에 2만 명, 하카다(博多)에는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귀환을 기다리며 체류해 위생상태도 극도로 악화되었다.91) 그 중에서도 “시모노세키는 생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 되고 있었다고 보고된다 (小林聡明, 2012:67).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귀환 과정에 대한 구술에서 이 시기가 “초가지붕에 서리를 맞아서 잎은 다 마른 하얀 박이 남아있었다”(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김치우 증언편)거나 “들어가 서 곧 김장 김치를 담그고, 동지팥죽을 끓였다”(최순례 증언편)고 기억되는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이었다는 점92)은 이들의 이주가 GHQ의 일본 점령 기간 동안의 조선인의 월경에 관 한 정책 차원의 대책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이것은 패전 직후 일본의 원폭피 해자들이 다른 일반의 전재민과 동일한 범주로 엮였던 사정을 비추어보아도 충분히 짐작가 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고국으로 귀환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귀환 동포들 또한 원폭피 해자로서 특별한 대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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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핵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일본사람들도 거기 밭이 많잖아, (원폭을 맞 아) 식구들이 죽으면 사람들이 밭 가운데서 화장을 해. 집이 부셔졌으니까 그런 걸로 화장을 해.
근데 사람들이 자기 식구 화장 다하고 치다꺼리 다하고 멀쩡한 사람이 그냥 죽어버리는 거 야93)...(중략)...원폭 당하고 나가지고도 보면 이 사람들이 상처를 입어가지고 너덜너덜 한데 (먹을 게 없으니 밭에서) 고구마 캐서 먹고, 그리고 그냥 걸어 다니다가 죽는 사람도 허다분 하고. 밭에 사람들 화장하느라고 밤새도록 환해. 집에 불을 안 켜도 환해. 전기가 안와도 집안도 밝고 그래.
참 그런 거 생각하면 너무도 끔찍하고....(중략)...그렇게 생활을 몇 달을 했는지 동네 사람들이 우 리가 이북에서 온지 알고 가지 말라고. 이북에 가면 소련 놈들 때문에 못산다고 가지 말라고 하 더라고. 그래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 사이에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봐 소문이 있었나봐. 그래서 왔어. 부산으로 들어와서 대구로 갔어. 대구에 우리 외삼촌 찾아 갔다가 일본 사람들 살다 나간 집을 구한 거에요. 거기 가보니까 일본 사람들 살림살이 그대로 있고, 아 이 사람들이 쫓겨갔구나 할 정도로 그 느낌이 남아 있더라고. 그래서 한동안 거기에서 거처하고 있 었어요. (박정자, 여, 1934년생)
박정자 씨의 증언에서도 비치지만, 해방 직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지는 소식과 소 문들은 재일조선인들 사이에 고국으로의 귀환을 결정하는 데 있어 복잡하고 이중적인 신호 를 보내고 있었다. 조선에서 쫓겨 나온 일본인들이 내지의 조선인들을 몰아낼 것이라거나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병사들이 아녀자들을 겁탈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 다. 그러나 동시에 '이북에 소련 놈이 들어 온다', '반도가 좌우로 갈라져,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고국'의 경제적 궁핍과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좌우익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에 대한 소식은 이들에게 고국이 완전무결한 안전한 정착지는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이들의 귀환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무엇보다 고국으로 돌 아가면서 포기해야할 재산 문제였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환하는 이들이 지닐 수 있 는 지참금은 현금으로 천 엔이었다.94) 그런데 같은 시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 선의 정규 운임이 15 엔에서 30 엔 정도였고, 공장에서 단순 노무자로 일하던 성인 여성의 임금이 하루 1 엔 10 전, 한 달 약 30 엔(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하서운 증언 편), 성인
93) 박정자 씨가 말한 '갑자가 멀쩡하던 사람이 그냥 죽는' 상황은 원폭투하 직후 초기/급성기 사망자들이 속출했던 때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 원자폭탄의 인체에 대한 영향에 대한 기록은 부록을 참조.
94) GHQ와 SCAP이 해방 직후 작성한 문서를 통해 재일조선인 귀환 등을 연구한 김태기(1998:251)에 따르면 재일조선인의 본국 귀환 시 지참금 제한은 GHQ의 경제과학국(Economic and Scientific Section, 약칭 ESS)이 점령 직후인 1945년 9월 22일 '금, 은, 증권 및 금융상의 제증서의 수출입통제' 를 일본정부에 지시한 것에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재일조선인이나 중국인의 본국 귀 환 시 지참금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가, 대장성이 일본 경제 악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 며 2000엔으로 제한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GHQ 측은 일본의 자산 유출에 따른 경제 악화, 자 산 유입된 한국의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더욱 엄격한 입장을 취했고, 지참금의 한도는 1000엔으로 결정 된다.
남성의 경우 하루 2~4 엔, 한 달 약 60~120 엔 정도(정근식 편·진주 채록(2005)의 박도섭, 김인태, 박홍규 증언 편; 한국원폭피해자협회(2011)의 정일봉 증언 편 등 참조)였다는 증언 들과 비교했을 때, 가구당 천 엔은 이들의 임금을 하나도 쓰지 않고 1~3년 정도 모아야 가 능한 금액이었지만 생활 기반을 잡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라는 것이 분명했다.95)
(원폭 후에)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카바 같은 거 막을 쳐가지고 일본에서 죽 지내면서 일본정부에서 주는 배급 같은 거 먹고 살았지. 그리고 시내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촌 같은데 가 서 과일 같은 거 주워서 팔고 했지. 말하자면 불법이지. 그렇게 돈을 모아서 12월 23일엔가 여러 명이 합해 배를 구해서 오는데 27일 걸립디다. 그때 부산으로 들어왔어. 당시 일본돈 만 엔인가 천 엔인가를 교환을 해줬어. 딴 사람들은 돈을 짐 속에 넣어놔서 꺼내지 못했는데, 나는 바지 허 리춤 허리띠에 넣어서 와서. 천 엔인가 보다. 7천원 주더라고. 동생하고 (귀국해서) 합천에서 살 았어. 내나 거창이 합천 옆이고 오촌 친척들이 있어서. 내가 일본에서 안 오는긴데, 그때 아버지 유골이 (히로시마) 절에 있었거든. 그때 해방되고 사람들 독립되어서 좋다고 한국 간다 하는데 나는 안 가고 싶었는데, 유골이라도 아버지가 얼마나 가고 싶겠나 싶어서 온 거야. 옛날에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기름종이에 엄마 속옷을 꺼내서 놓고 거기에 유골을 넣어 서 싸서 거창에 큰아버지한테 보냈었거든. 그게 생각나서 엄마 아버지 합장을 해야겠다 싶어서 가지고 나왔어요. 그리고 와서 합장을 했어요. (김수영, 여, 1928년생)
그해 음력으로 9월 초인가 나왔어요. 양력으로 10월 중순경이지. 그렇게 나오는데 야미배(밀 선) 타고 24일이나 걸려서 왔어. 대마도에 가는데 23일이 걸렸어. 배가 아주 육지 근처로 섬들을 다 거쳐서 갔어요. 그리고 오다가 배가 파산될 정도까지 되고 그랬어요. 아주 고생을 많이 했어 요. 오다가 죽은 사람도 많잖아요. 근데 그때 우리가 아버지가 못나오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폭격 날은 많이 안 다쳤는데, 나를 찾으러 다닌다고 시내를 많이 다니다가 그랬는지 독가스를 많이 마 셨어. 어머니랑 한참 그러고 다녔대. 그러니까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찾아놓고 하혈이랑 토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쌀미음도 먹이고 산에서 무슨 약초라고 캐 와서 쪄서 먹이 고 그러셨어. 그리고 그런 말이 있었거든. 그때 한국에 일본 사람들을 다 내쫓았는데, 그 사람들 이 일본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 모른다 그런 소문이 돌았거든. 실제로 우리가 그런 것을 당한 것 은 아닌데. 그렇게 하니까 "집으로 가자" 하게 됐지. 근데 아버지가 치료가 제대로 안 되니까 같 이 나올 수가 없잖아. 무슨 치료까지 했냐면 우리 동생 네 살짜리 똥을 싼 것을 구워서 바르고 하는 것도 했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남동생 둘을 남겨두고 우리는 어머니랑 95) 박도섭, 김인태, 박홍규 씨의 경우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징용된 경우였고, 정일봉씨의 경우에는 현지 에서 동원된 경우였다. 하지만 징용자들의 경우에는 임금에서 숙식비, 보험료 등을 모두 내야했기 때문 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홍규 씨는 본인이 ‘반장’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4엔 정도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구자가 면담한 이들 중에도 징용자들이 있 었는데(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문두성, 김한수, 유장석 증언편), 이들도 임금에 대해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당시 받은 임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쓰기도 모자라 고향에서 부쳐주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하 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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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나온 거야. 엄마, 나, 동생 둘만 나온 거야. 돈도 우리가 가져오고 짐도 다 가져오고.
근데 나와서 보니까 부산항에 나올 때 아주 붕대를 하고 아주 꼴이 말이 아니게 나왔거든. 근데 일본 돈으로 천 엔만 바꿔주더라고. 근데 식구대로 넷이 왔으니 넷이 바꾸면 되는데, 아버지가 나 갈 때 돈을 바꾸지 말고 아버지 올 때까지 기다려라 해서 나만 바꾸고 나머지는 집에 놔뒀는데, 아버지가 그 다음해 3월에 나오니까 그 돈이 휴지조각이 됐지. (한일순, 여, 1930년생)
한일순씨는 1930년생으로, 그녀의 가족은 합천군 쌍책면에서 농사를 짓다가 1930년대 후 반 더 이상 생계유지가 어려워 어머니 친척들이 많이 있던 히로시마 고이로 갔다. 아버지는 토목 공사장에서 일용 노동일을 했고, 어머니는 어린 자녀를 두고 간즈메(통조림) 공장에 일 을 나갔다. 한일순씨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다가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공장을 다니기 시작 했는데, 처음에는 인쇄공장에 취직을 했다가 피폭직전에 요시지마에 있는 정미소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 1엔 10전이 조금 넘는 돈을 받았다. 그녀가 직전까지 일하던 인쇄 공장과 그 녀가 매일 참여했던 조회행렬의 행선지가 폭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만약 그 녀가 직장을 옮기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격 날 그녀는 출근 중에 무너진 회사 건물에 깔려 큰 부상을 입고 구호소로 옮겨졌는데 일주일 정도 움직이지 못하 고 병상에 있다가 '고이' 사람을 찾는 이를 겨우 만나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삼촌과 그 가 족, 그리고 삼촌이 데리고 일을 하던 공사장의 인부 40여명이 모두 사망하고 시체도 찾지 못했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본인을 찾아 나섰다가 더 큰 병을 얻은 아버지를 히로시마에 남겨 놓은 채 고향으로 돌아온 게 그해 가을이다. 인터뷰에서 한일순씨는 당시 부산항에서 식구대로 돈을 다 바꾸었으면 괜찮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가구당 천 엔 한정이었으므 로 식구들이 잘못 알아 그리 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 이 ‘천 엔’에 대 한 감각은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생활기반을 잡는 데 겪은 어려움들과 뒤섞여 한맺히게 기억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충분한 준비 없이 이뤄지는 귀환의 과정이 쉽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미리 한국으로 부친 짐을 중간에 잃어버리거나, 직접 가지고 오더라도 배가 난파하면서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은 예사였고,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해서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그때 번 돈을 모아둔 곳이 있었는데 땅속에, 거기를 파서 돈을 가져오시고. 그 때 우리 삼촌이 가이타(海田)엔가 사셨는데 한국에 가자 해서 오게 된 거야. 시월쯤 됐나봐. 야미 배 하나를 여러 집이 어울러서 탄 거야. 배가 울렁울렁하니 똥물까지 올라오는데, 기관고장이 나 서 대마도에서 3일이나 있으니 먹을 것도 없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한 보름 만에 부산에 도착 을 했어요. (1932년생, 여, 전순임)
친척들이 다 같이 나왔어요. 근데 우리 할머니가 바다 멀리 오면 혼이 못 따라 온다고 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