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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와 운동의 방편으로서 수첩의 교부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63-168)

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1) 치료와 운동의 방편으로서 수첩의 교부

이와 같이 일본 사회에서 자이칸히바쿠샤, 즉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가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한일협정이 이루어지던 1965년을 즈음한 기간 동안 양국 시민사 회 간의 '연결'은 시민사회 운동 진영 인사들과의 사회적 연줄망 그리고 기존에 형성되어 있었던 히로시마의 재일한국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간 연줄망이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 토대는 식민지 시기의 ‘내지’와 ‘조선’으로의 이주와 귀환, (한국원폭피해자 들의 경우는 특히) 귀환 이후 밀항을 통한 재(일본)입국 과정 등을 겪으면서 형성된 한국원 폭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운동가들의 사회적/인적/문화적/교육적 자본 등에 깊은 사회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같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이후 일본의 시민 사회 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보다 직접적인 호소들에 응답하는 배경이 되고, 한국 정부의 원폭피 해자 원호에 대한 무관심 및 방치와 맞물려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물 꼬를 트게 된다.

- 149 - 사토 총리대신 각하

한일친선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세계항구평화를 위해 애쓰는 각하의 열의에 대해 우리는 최 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한국에는 1만 5천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원폭피해자가 현존하는 것 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그 중 6,258 명이 우리 협회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 리 한국원폭피해자는 태평양전쟁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희생되었 습니다.

물론 무차별 대량학살의 무기로서 처음 사용된 원자폭탄은 미국(연합국 측)이 투하한 것이지 만, 우리는 일본정부를 위해 징용,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징발되었고 일본의 전쟁목적에 사역된 사람들입니다. 강제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희생된 선의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전쟁당사자인 일본 및 미국정부가 당연히 손해를 보상해주어야 할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재한피폭자들(유족 및 피폭생존자)은 원폭이나 그 환자들의 특수성에 대해 전혀 이 해가 없는 한국 사회 어디에서도 돌아봄 없이 그 생활이나 병증은 비참할 데 그지없으며 정치적 혹은 국제법적 문제는 참으로 애석하고 인도적 입장에서 보아도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로서 이제야 국제적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전후(戰後)는 끝났다며,126) 이제부터 세계평화질서의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는 귀국 일본이 전 쟁 전에는 같은 동포로서 같은 혈육이라 부르며 사역하고 희생한 한국피폭자들에 대해 짐스러워 하게 된 지금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일본국의 법률 밖의 문제라는 이 유로 대책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어제의 동포 한국피폭자들에 대한 태도로서는 아무래도 비인도적인 것이라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중략)....피폭26년, 망각된 한국피폭자들은 여기에, 이 고통과 그 뜻을 각하에게 호소하는 광영을 얻은 기회에 다음의 세 가지 점에 대해 특히 요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1. 재한피폭자에 대한 원폭수첩 교부는 사실문제로서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원폭투하 당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거주하면서 피폭 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

그녀들은 이 편지가 자신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여성회원들이 사또 수상에게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그 내용을 협회 본부에 전달해 그것을 다시 협회 대표인 신영수 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수상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일 수 있다. 편지의 발송자에서도 ‘한국원폭피해자 일 동’이라고 되어 있는 점도 그러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1972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진 호소문에 담긴 협회의 공식적 요구 사항에 '수첩 취득'에 관한 사항이 없다. 이 요망서의 번역된 전문은 『한국원폭피해자65년사』(2011)에 실려 있다.

125) 이 편지는 그 자체로 1970년대 당시 부산의 중년 여성원폭피해자들에 의해 쓰인 세련된 문어적 표 현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에서 그 형식을 가능케 한 그녀들의 교육적 배경 등을 추측케 하지만, 사실 한국원폭피해자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하다보면 특히 1930년대 초반 이전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 은 이들이 보통 수준의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특히 연구자는 현지조사 기간 동안 이미 다른 많은 원폭협회 회원들로부터 이 시위의 주요 기획자였던 엄분연 씨에 대해 ‘그이는/‘그 언니는 우리 일본말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도 말도 너무너무 유창하고 똑 똑하게 잘한다’는 말을 들어왔던 터였다.

126) 1971년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반환협정을 체결한 후 사토 총리가 한 말로 그때까지 일본을 규정해 온 전후 질서가 종결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는 일이 아닙니까? 치료를 위해 일본에 입국해도 특별수첩이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한국으로 돌 아오는 예도 있습니다...(하략)

<1971년 8월 한국원폭피해자 일동>

신문 지면을 통해 짧은 단신 기사로 기록을 남긴 위 사건은 일본 누노가와(布川徹郎) 감 독의 다큐멘터리 『倭奴へ』(한글제목: 왜놈에게)라는 53분짜리 영상 속에서 보다 생생하게 그려진다. 부산의 한 언덕배기 좁다란 골목에 위태롭게 자리잡은 허름한 판잣집들과 헐벗은 달동네 아이들의 모습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의 일본 여성이 흡사 여행 가 이드처럼 나레이션 하는 이 영상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사또수상에게 재한원폭피해자에 대한 원호를 바라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 는 한국 여성원폭피해자들을 따라 다닌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 고 경찰차에 호송되어 종로서로 향하는 모습, 작은 사무실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을 전면 에 걸어놓고 사무를 보고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 사무실의 모습도 비친다. 1968년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귀환 조치된 손귀달과 그녀가 밀항 당시 탔을 법한 작은 통통배며, 초창기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에 소속된 회원들이 중간 중간 인터뷰하는 장면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일본에서 살던 시절에 배운 일본어 노래를 애잔하게 부르는 장 면들도 비친다. 경찰서에서 풀려나 부산으로 돌아온 이들에게서는 서울의 협회는 이런 일에 관심도 없고 도와주지도 않는다는 불만들이 쏟아진다.

연구자가 이제는 할머니가 된 이 영상 속의 세 중년 여성을 만난 건 2008년과 2011년이 었다. 2008년에는 원폭협회에서 회원카드를 정리하던 중 영상 속의 인물들 가운데 서울에 거주하는 분을 일부러 찾아간 경우였고, 2011년에는 생애사 인터뷰를 위해 들른 합천 복지 관과 부산에서 지부를 통해 증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추천된 분들을 만났는데 우연찮게

−하지만 증언이라는 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한국원폭피해자의 생애사 인 터뷰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어떤 점에서 필연적으로−그렇게 된 것이었다. 세 사람 모두 40 년이 다 된 그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세 분들 중 그 누구 도 이 영상이 담긴 테이프를 건네받은 적도, 본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누노가와 감독이 테 이프를 한국으로 보냈지만, 정보당국이 압수했기 때문이라고 이태순씨는 기억하고 있었 다.127) 또한 영상에서는 “시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잡혀간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시 위는 당연히 못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오히려 “잡혀가야 뉴스가 된다”고 생각

127) 하지만 그 이유가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원폭피해자문제를 다룬 것이어서 그랬는지, 혹은 이 영상의 주제가 ‘반전’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그랬는지, 혹은 두 이유 모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일 본의 평화운동의 맥락에서 원폭피해자가 그 존재 자체로 ‘반핵’과 ‘반전’ 메시지를 담는 중요한 표상이 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히로시마의 한국원폭피해자위령탑의 평화공원 안으로의 이전 문제를 통해 '자 이칸히바쿠샤' 문제를 알게 된 누노가와 감독이 사토 수상의 방한을 계기로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기 위해 한국의 여성원폭피해자들을 만나러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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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그렇게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영상 속에서도 그들은 다른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미디어 재현에서 일반적으로 비치는 수동적이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난 이들 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차고 힘센 어조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을 히바쿠샤의 경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중요한 또 다른 경계 중의 하나는 초기 원폭의료법의 적용 범위와 관련된다. 정책이 미치는 범위로서 시정 권(施政權)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경계가 처음 문제가 된 것은 미군 점령 하에 있었던 오 키나와제도의 원폭피해자들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생겨난 논란에서였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는 일본국의 시정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는 입장에 따라 원폭의료법 의 적용에 있어서도 “일본국의 시정권이 미치는 지역 내에 거주하거나 현재하지 않는 자는 히바쿠샤가 될 수 없다”라는 해석을 내놓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에 의해 수립된 당시의 유구(琉球)정부, 즉 지금의 오키나와현의 원폭피해자들을 법 적용으로부터 제외시켜 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키나와 현 원폭피해자들의 반발이 생겨나고, 1964년 오키나와현원자폭탄피해자 연맹을 결성해 일본정부에 원폭의료법 적용을 요구하는 운동을 착수하자, 일본정부는 이듬 해인 1965년 4월 5일 유구 정부 후생국, 미국 민정청(USCAR) 사이에 ‘유구제도 주민에 대 한 전문적 진찰 및 치료에 관한 요해각서’를 교환하고 이들에게도 원폭의료법을 적용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유구제도의 원폭피해자가 ‘테쵸’를 받을 수 있는 히바쿠샤이면서 ‘인정피폭 자’가 되어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보내져야 하며, 일본으로 보내진 ‘유구제도의 히 바쿠샤’는 일본에 거주하는 히바쿠샤와 동일한 치료와 특권, 수당을 부여한다고 명시됐다. 같은 해 오키나와현원자폭탄피해자연맹은 그 명칭을 오키나와현원폭피폭자협의회로 개칭했 고, 이후 오키나와현 원폭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은 1972년 반환 이전까지 이 같은 요해각서에 따라 일본법이 특수하게 적용되는 형태로 실행됐다. 반환 이후에는 시정권이라 는 측면에서 특별히 오키나와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원폭의료법이 다시 한 번 시정권이라는 경계를 내세우게 된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원폭피해자의 존재의 등장과 관련된다. 앞서 인용한 부산의 여성원폭피해자들의 편지 에서처럼, 이 “외국인”들은 “전쟁 전에는 같은 동포로서 같은 혈육이라 부르며 사역하고 희 생한 한국피폭자들”로서 자신들에게도 ‘원폭수첩 교부’를 사실문제로서 인정해달라고 호소 하기 시작했다. 이 요구는 앞서 1968년 역시 부산지부의 회원이던 손귀달 씨의 밀항 사건이 마무리되던 시기 또한 같은 부산지부의 엄분연 씨와 서울에 거주하던 임복순 씨의 도일 후 원폭수첩 신청과 관련되어 있었다.

1968년 12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부산 지부장이던 엄분연 씨와 서울에 살고 있던 회 원 임복순 씨는 손귀달 씨의 밀항 사건을 계기로 연대하게 된 <한국피폭자구원한일협의회>

의 초청을 받아 교토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인전몰자위령제에 참가하게 된다. 이들은 위령 제 참례 후에 히로시마원폭병원에 치료차 입원했다. 그리고 임복순 씨는 “나는 여자정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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