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2)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수첩 재판 일람과 곽귀훈 소송의 의의
일본 후생노동성 ‘402호 통달’ 조치가 일본의 영역 바깥의 원폭피해자들을 배제하는 논 리로 기능하는 가운데 1998년 처음 시작된 곽귀훈 소송(아래 표 5번)과 이강령 소송(아래 표 6번)의 최종 결과가 나온 2000년대 초반은 일본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히바쿠샤라는 범주 에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상시적으로 포함되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2002년 12월 오사카지 방재판소는 해외에 거주하는 히바쿠샤에게는 건강수당 지급을 중단하게 하는 후생성 ‘402호 통달’은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본의 영역에 거주관계를 갖지 않더라도 이 법의 적용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적시했다 (아래 표 5번, 6번). 그리고 이 판결은 또 한 이후 ‘소송을 통한 운동’이라고 할 만큼 일본 정부(후생노동성)를 상대로 한 각종 소송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래의 표는 그 가운데 현재까지 일본 <시민회>와 변호단 등의 도움을 받아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들을 정리한 것이다.
- 167 - 나가사키 지방법원에 제소
3
한국원폭 피해자 미쓰비시 징용자동 지회 회원
1995.12.11
‘한국원폭피해자 미쓰비시징용자 동지 회’ 회원 6명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강제노동· 피폭의 손해배상 및 미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재판을 히로시마 지방법원에 제소
1999년 3월 25일 1심 패소, 원고 46명 가운데 재판 중 사망한 6명을 제외한 40명이 항소
2005년 1월 19일 2심 승소, 히로 시마고등재판소는 402호 통달에 의한 정신적 피해를 인정, 일본정 부로 하여금 1인당 120만 엔의 배 상금을 지급하도록 판결. 강제연행 에 대한 배상청구는 각하. 원고와 피고 모두 상고. 재판 진행 중에 원 고 46명중 23명 사망
2007년 11월 1일 최고재판소 승 소, 1인당 120만 엔의 배상금을 지 급하도록 일본정부에 명령
4 상동 1996.8.29
‘한국원폭피해자 미쓰비시징용자동지 회’ 회원 40명이 위와 같은 내용으로 추가로 제소
5 곽귀훈 1998.10.1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인 곽귀훈씨 가 일본에서 취득한 ‘건강수첩’이 한 국 귀국에 의해 무효가 되고, 5년간의 수급권이 인정된 건강관리수당을 중단 한 것은 부당한 처분이라며 오사카 부 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처분의 취소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제소
2001년 6월 1일 1심 승소 2002년 12월 5일 2심 승소, 일본 정부 상고를 포기 ‘402호 통달’의 위법성 확정
이 재판으로 수첩을 교부받은 한국 원폭피해자들이 한국에서도 '피폭 자건강수당'을 수급하게 됨
6 이강령 1999.5.31
나가사키 시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곽 귀훈과 동일한 피폭자원호법 재판을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 제소
2001년 12월 26일 1심 승소 2003년 2월 7일 2심 승소 2006년 6월 13일 최고재판소는
‘재외피폭자에 대한 수당지급 주체 는 국가가 아닌 도도부현, 히로시 마 시, 나가사키 시’라고 판결 7 김재삼 2001.10.3
오사카시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으 로 귀국하여 중단된 특별수당의 지불 과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오사 카지방재판소에 제소
2003년 3월 20일 1심 승소
8 최계철 2004.5.18
시효로 미지급된 건강관리수당 지급과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시효재판’을 나 가사키 지방재판소에 제소 (같은 해 7 월 25일 최계철씨 사망으로 유족이 재 판 승계)
2005년 12월 20일 1심 승소 2007년 1월 22일 2심 패소 2008년 2월 18일 최고재판소 승 소. 이 판결의 결과로 시효로 미지 급된 건강관리수당을 소급해 받게
됨
9 최계철의
유족 2004.9.21
최계철씨 유족이 한국에서 신청한 장 제비지급신청 각하처분에 대해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에 제소
2005년 3월 8일 1심 승소 2005년 9월 26일 2심 승소, 나가 사키 시 상고 단념
10 정학련 박원경의
유족
2004.9.21
정학련, 박원경씨 유족이 한국에서 신 청한 장제비 지급신청 각하처분을 취 소하는 소송과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제소
2005년 9월 26일 승소
11 이상화·
주창윤 2005.6.16
피폭확인증을 교부받은 미쓰비시 히 로시마 징용공 피폭자 소송 원고인 이 상화씨가 한국에서 신청한 피폭자건강 수첩교부신청 각하처분 취소 및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 주창윤씨는 한 국에서 신청한 건강관리수당신청 각하 처분취소와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재판 을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 제소(주창 윤씨가 같은 해 7월 9일 사망하고 유 족이 재판 승계)
2006년 9월 26일 1심 패소, 2007 년 4월 2일 이상화씨 사망으로 유 족이 재판 승계
12강미자외
6명 2006.8.1
피폭확인증을 교부받은 한국원폭피해 자 7명이 한국에서 신청한 수첩교부신 청, 건강관리수당신청에 대한 각하처 분취소 및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수첩 재판’을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소
2009년 6월 18일 승소
13 정남수 2007.2.21
피폭확인증을 받은 정남수가 한국에서 신청한 수첩교부신청 각하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 제 소
2008년 11월 12일 1심 승소 이 재판 승소로 한국원폭피해자들 이 일본에 직접 가지 않고, 한국에 서 수첩 신청과 교부가 가능해짐.
14
한국원폭 피해자협 회 회원 대부분
2009.12.18
원폭피폭을 인정받았으나 일본에서 떠 났다는 이유로 건강관리수당을 지급받 지 못했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1인당 110만 엔을 지급하기로 결정. 일본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낸 한국인 피해자 1408명 가운데 오 사카 지방법원에 가장 먼저 소송을 낸 130명이 우선 대상, 이후에도 순차적 으로 집단소송이 진행됐으며 현재도
일명 ‘402호 통달 위자료 청구소 송’으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가 입된 이들 중 피폭자건강수첩을 교 부 받은 이들이 지부별로 집단 소 송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위자료를 받게 됨.
- 169 - 진행 중
15 장영준 2011.5.
2009 년 1 월 나가사키 시에 입시피 폭자로서 수첩 교부를 신청했지만, 증 인이 없는 것 등을 이유로 기각. 거부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현에 심사 청구 도 기각 된 것으로, 증인은 없지만 본 인의 기억만으로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냄.
2012년 9월 18일 승소. 장영준씨 는 재판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 망.
2012년 10월 2 일 나가사키 시는 후생노동성의 지도에 입각 "죽은 사람에게 수첩을 교부하는 것은 제 도의 원칙에 반한다"라고 후쿠오카 고등법원에 항소
16 김승남 곽복남 곽풍자
2011.
12.28
김승남씨는 나가사키에서 생후 8개월 때 피폭 당했으나 증인이나 기억이 없 어, 곽복남과 풍자 자매는 기타규슈에 살던 중 10일간 나가사키에 소개해 있 다가 피폭해 증인이 없어 피폭자 건강 수첩 신청이 각하됨. 이에 나가사키에 서 피폭 당했다는 증명이 불충분하다 하여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신청이 각 하된 것은 부당하다며 나가사키시를 상대로 각하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요구 하는 소송을 냄
2013년 2월 현재 진행 중
표 4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원폭피해자 소송
[이 표의 내용 출처: 1번~13번(이치바 준코, 2003; 우츠미 아이코, 2010), 14번(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 15~16번(『長崎新聞』)]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이 소송들을 통해 우선 2003년부터는 일본의 영역 바깥에서도 피폭자건강수첩 취득자, 즉 히바쿠샤로서 피폭자건강수당 등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위의 표 5, 6, 7번이 해당 소송). 그러나 일본 후생성은 여전히 이 수첩의 신청과 교부는 일본의 영역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한국에서 신청한 수첩 교부에 각하 결 정을 내렸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본에 갈 수 없는 고령의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경우 수첩 신 청이 불가능했지만, 이는 2008년 11월 '정남수 소송'의 승소를 계기로 이후 한국에서의 수첩 신청이 가능한 것으로 변화했다 (위의 표 11, 12, 13번이 해당 소송).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이러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402호 통달' 조치의 위법성이 2007년 11월 1일 최종 확정됐다. 1995년과 1996년 ‘한 국원폭피해자 미쓰비시징용자 동지회’에 소속된 회원 46명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동원·강제노동·피폭의 손해배상 및 미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재판에서였다. 2005년 1심 패소에 항소한 이들에 대해 히로시마고등재판소는 402호 통달에 의한 정신적 피해를 인정, 일본정부로 하여금 1인당 120만 엔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했고, 2007년 최고재판소는 이를 확정 판결했다 (위의 표 3, 4번이 해당 소송). 이 재판은 이후 '402호 통
달'로 인해 피폭자건강관리 수당 등의 지급 등에 피해를 받은 모든 재외국민 히바쿠샤들에 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한 판결로 이어졌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위의 표 14번이 해당 소송). 또한 일본 사법부는 '402호 통달'과 시효 문제 등을 이유로 과거에 미지급된 피 폭자건강관리수당의 지급도 명령했다 (위의 표 8번이 해당 소송). 이로써 이제 한국원폭피해 자들은 일본의 영역과 거주관계를 갖지 않고도 히바쿠샤가 될 수 있게 되었고, 히바쿠샤의 시정권적 경계는 허물어지게 되었다.140)
2002년 곽귀훈 소송의 승소 판결은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수첩의 의미도 크게 변화시켰 다. 한국에서도 피폭자건강수첩을 소지한 히바쿠샤들에게 수당의 수급이 가능해지면서 수첩 은 이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들이 진짜임을 인증하기 위한 자격증이 아니라,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이 상정한 히바쿠샤라는 범주로 직접 편입되기 위한 ‘통 행권’ 혹은 ‘혜택’을 보장하는 ‘보험증’ 혹은 ‘연금증서’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수첩은 회원 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히바쿠샤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