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제도화 과정
4. 소결: 일본에서 ‘히바쿠샤’의 정치사회적 의미 구성
본 장에서는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이 수립되기 이전의 ‘원폭생존자’ 조사와 구호 활동 속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피폭’과 ‘히바쿠샤’라는 용어가 비키니피재를 계기로 전 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원폭3법의 성립과정을 살펴보았다. 일본 정부는 원폭피해자구호정 책의 수립 과정에서 반핵평화운동단체나 원폭피해자단체들이 사용하던 ‘원자폭탄피해자’나
‘원폭환자’, ‘원폭피재자’, ‘원폭장해자’ 등과 같은 용어가 아닌 ‘원자폭탄피폭자’, 즉 그 단어 를 줄여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히바쿠샤’라는 단어를 특정했다. 원폭의료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 ‘히바쿠샤’라는 용어가 일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은 아니 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히바쿠샤’라는 용어는 적어도 이전까지의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구성원 범주(membership category) 혹은 새로운 자격의 범주(new categories of entitlement)가 탄생했음을 의미했다.
일본 원폭피해자구호 정책에 있어서 새로이 탄생한 이 ‘히바쿠샤’의 범주에 대해서 Petryna(2002, 2004)의 ‘생물학적 시민권’(biological citizenship)의 개념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피해도 아닌 ‘원자폭탄의 신체적 상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의료 지 원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대한 권리와 지위를 한정해 특정한 법적, 의료적 지원을 보장하 는 의미하는 범주로서 ‘원자폭탄피폭자’는 신체적 상해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국가의 보 상을 의학적, 과학적, 법적 기준에 근거한 사회 복지의 한 형태로 요구하는 것(그러나 제한 적인 접근)이라고 정의한 Petryna의 ‘생물학적 시민권’ 개념으로 비유될 수 있다.55) 그런데
보상 요구가 제기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후보상 문제는 야스쿠니신사 문제와 대응․연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전후에 있어서 여러 전몰자 ‘위령’추도의 대항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결부될 수 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전후(戰後) 일본에서 ‘국가’가 나서서 수행한 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란과 모순 속에서 그 전쟁에 목숨 바쳐 헌신한 ‘개인’(특공대)의
‘위령’ 추도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애도’의 문제에 대해서 이영진(2012)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55) 소비에트체제의 붕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독립국의 시민이 된 이들의 ‘위험’을 관리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맞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체제로부터 독립하고, 새로운 입법을 마 련하는 과정에서 구소련체제의 체르노빌 관리 정책을 “인종학살법”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새 로운 의회는 소련체제의 체르노빌 관리 정책을 폐기하고 이 재앙을 다루는 것을 그들의 국가와 국제적 정당성을 얻는 핵심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시민들의 ‘피폭된 신체’를 구제하는 것으로서 독립된 ‘국가’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 그러나 Petryna의 이러한 생물학적 시민권 개념은 Rose(2006)의 그것과는 다르다. 현대 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라 자기-정체성self identity와 자기-레짐 regime of the self의 변화에 주목한 Rose는 기존의 국민국가의 틀을 기본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시민
Petryna가 ‘시민권’을 기존의 국민국가와 시민 관계라는 한정된 용어로서가 아니라 일반적 으로 권리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의무임과 동시에 배제 혹은 박탈을 부여하는 특정 집단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자격의 범주’, 그리고 ‘구성원 범주’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 서, ‘히바쿠샤’ 범주의 경계 설정은 좀 더 설명되어야 할 점들이 있다.
현재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은 확실히 아래로부터 수렴되어간 측면이 강하다. 원수 폭병기 반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자 구 호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원폭피해자 구호의 제도화는 힘을 얻었다. 특히 1950년대 초중반 한 국전쟁을 즈음해서 전후 냉전 체제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핵무기 개발 경쟁에 따른 대기중 원수폭 실험에 대한 일본 사회의 경각심은, 패전 후 별다른 전쟁 책임을 지지 않고 있던 일본 정부가 유일피폭국이라는 도덕적 당위 속에 원폭피해자구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폭피해자 구호와 보상을 요 구하는 움직임은 비키니 피재를 계기로 고양된 반핵평화운동과 결합하는데, 이 과정에서 원 자폭탄에 ‘피폭된 신체’는 이 운동에서 중요한 사회적 실천의 매개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원폭피해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과 지원의 문제는 ‘위험에 처한 인구’에 대한 적극적인 구제를 통해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국가의 목적과 곧바로 연결되지 는 못한다. 일본정부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의 문제는 식민지배와 전쟁 수행의 주체로서, 전전(戰前)의 국가 행위에 대한 어떠한 책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패전 후 그 같은 문제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던 기존의 입장과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즉 원자 폭탄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 수준을 결정하고, 그 대상이 되는 범주의 경계를 한정 짓는 행위는 전전의 국가 행위에 대해 정치적으로 평가해야 함을 전제하는데 이는 매우 민 감하고 복잡한 맥락 속에 놓여 있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피해자와 관련된 원호와 보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1951년 9월 8일 조인 후 1952년 4월 28일 발효)을 즈음해서 다. 강화조약을 앞두고 일본 정부는 전몰자 등에 대해서 원호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하게 된 다. 1952년 4월 28일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연합군이 철수한 뒤인 4월 30일, 일본정부는 즉 각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공무상 사망한 군인, 군속의 유족에게 는 유족연금과 위로금을, 동일하게 장해자에게는 장해연금, 동원학도, 징용공, 여자정신대, 국민의용대 등 준 군속의 유족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하게 했다. 또한 이 법에는 국적 조항을 명기함으로써 전쟁의 손해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반드시 과거 전쟁을 수행한 주체로서 국 가와의 고용관계가 있는 이들에게만 한정된다는 신분관계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처럼 샌 권 차원의 논의이기 보다는 국민국가의 정치적 장과는 점점 해리되어가는 세계 시장 속에서 포괄적으 로 이루어지는 현상들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일종의 생물학적 소비주의(biological consumerism) 논의로 분류한 Cooter(2008)의 지적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본 연구 사례인 일본의 원 폭의료법은 원폭 피해에 대한 국가 보상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Petryna의 생물학적 시민권 논의와 더 긴밀하게 연결된다 (Adriana Petryna, 2002, 2004; Coot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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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 전후 전쟁피해자와 관련된 일본정부의 원호 문제가 활발하게 논 의되고 실질적인 보상으로 이어졌지만, 이때에도 원자폭탄의 피해자들이 전쟁 피해와 관련 된 원호조치를 받을 대상이라는 범주에 들지는 않았다. 미국은 앞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피해자들이 요구한 피해보상에 대해 패전국인 일본은 전쟁과 관련한 어떠한 손해나 보 상, 배상도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들어 대응한 적이 없었 다. 비키니 피재 직훈 원폭피해자들이 ‘쿠니’(國), 즉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원폭피폭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일명 ‘동경원폭재판’)은 이 같은 논쟁이 가로지르는 쟁점들을 잘 보여준 다. 당시 재판부는 이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강화조약으로 방기된 것으로서 기각되었으나 원폭의 투하는 국제법위반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원폭피해자의 “피해의 심대함은 도저히 일 반전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피고는 여기에 비춰 충분한 구제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 다언을 요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국가가 이들에 대한 구제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정부는 국내적으로는 국가가 행한 전쟁 수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 을 수 없으며, 전쟁으로 인한 일반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는 이른바 수인론(受忍論)을 내세 우고, ‘원자폭탄의 피해’는 극히 ‘특수한 피해’라는 점을 강조해나갔다. 즉 이는 역으로 ‘특수 한 피해’로서 원자폭탄의 피해는 언제나 ‘일반의 피해’와의 균형 속에서만 보상되고 지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바쿠샤 특수주의’의 저울질 과정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이 과정은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근간이 되는 원폭의료법과 원폭특별조치법,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해 새로 제정된 원폭원호법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때 혹은 그 후에 신체에 원자폭탄 의 ‘방사능 영향’을 받을 만한 사정 하에 있었던 자”, 즉 ‘히바쿠샤’의 ‘신체적 상해’가 그 피 해를 지원하는 것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실제 원폭피해 자 구호정책에서는 ‘원자폭탄의 특수한 피해로서의 신체적 상해’의 경계가 어디인가를 설정 해야 함을 의미했다.
한편 원폭피해자구호의 정치적 민감함은 일본의 국내적 차원이 아니라 한 때 ‘대일본제 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에는 국적도 다르고 거주하는 영토도 다른 ‘옛 신민들’과의 탈식민 지적 관계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1970년대에 진행된 손진두 소송과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 로 밀항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존재는 전후의 일본 정부가 전전의 대일본제국이라는 국가 를 맞닥뜨리게 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일본 정부는 그 간 회피해왔던 ‘옛 피식민국의 신민’의 존재, 즉 한국과 대만, 중국, 북한 등지로 귀환한 원 폭피해자들, 그리고 전후(戰後) 생계를 위해 브라질이나 미국 등지로 이민 간 일본 국적의 원폭피해자들, 그리고 전쟁 당시 유학이나 포로 등으로 끌려와있다가 자국으로 송환된 미국 이나 영국 등지의 원폭피해자들을 직시해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정부는 ‘히바쿠샤’ 범 주에 속할 수 있는 자격으로 일본의 영토적 경계 안에 거주하거나 일정기간 거류할 것을 명시하는 행정관료제적 규칙을 만들어내, 일본의 영토 바깥에 거주하는 과거 피식민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