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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원폭피해자의 정치사회적 등장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41-145)

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1) 한국에서 원폭피해자의 정치사회적 등장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에서 ‘피폭자’라는 용어가 신문지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은 일본에서 비키니피재 사건이 나던 195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에 서 원폭피해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기사는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간간히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원자탄 오백 개면 전 세계 인류 사멸, 미원자과학자 견해> 만핫탄 원자력공장에서 연구에 종사한 스태포드 워만 박사는 원자력회의를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쟁 중 광도(廣島, 101) 아마도 연구자가 인터뷰를 했던 이 세대가 부모세대들을 대신해 가정에서 완전한 책임을 지고 있지 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생활에 대한 고생담은 대체로 귀국 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그런 의미 에서 그 이전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시절'처럼 여겨지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일본원폭 피해자구호정책에 편입된 이상 이들이 일본에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들이 ‘진짜’ 히바쿠샤임을 내세우는 표식이 된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인터뷰과정에서 일본에서 태 어났거나 혹은 일찍부터 일본에서 소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태도가 예상했 던 것보다 훨씬 더 애틋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귀국이라는 것으로 인해 단절된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가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교육 받은 시기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도노무라 마사루(2010:116)는 전전기 재일조선인의 인구구조에 대한 연구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조선인 2세가 형성되는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연차라는 의미에 서의 '세대'라는 입장에서 이 시기 출생자들이 '쇼와 한 자릿수'(쇼와 1~9년, 서기 1926~1934년), '전 중파(戰中波)'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의 교육에서 강렬한 황민화 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있었 고, 전전기 재일조선인의 경우 그것이 특히 심해지는 조건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어째든 ‘귀환 동포’

로서 이 세대의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일본’에 대한 정서나 감각, 혹은 정체성은 분명히 한국사회의 일 반적인 내셔널리즘의 카테고리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이 또한 향후 좀 더 검토되어야 할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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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투하한 폭탄과 같은 원자탄 오백 개만 있으면 전 세계의 인류 및 동물을 사멸시킬 수 있다. 그들이 설혹 폭발 당초의 발동을 면한다 하드라도 치명적인 방사능 여파로 인하여 죽게 될 것이다. 폭발 당시의 피해를 면한 잔존자들로부터 인구는 일부 유지된다 하드라도 삼대사대후 손의 대부분은 기형아나 불구자가 나오게 될 것이다." (하략) (1947년 5월 31일 동아일보, 밑줄은 연구자 강조)

인용된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피폭자 혹은 원폭피해자라고 특정된 용어는 없지만 1947 년에 이미 “원자탄의 폭발과 그것에서 기인한 치명적인 방사능 여파의 가공할 만한 위력” 은 “전 세계 인류의 사멸”을 운운하며 다뤄지고 있었다. “폭발 당시의 피해를 면한 잔존자 들의 삼대사대후손의 대부분이 기형아나 불구자가 된다”는 이 같은 기사 유형은 같은 표제 어 기사 검색에서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그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원자 폭탄이나 원자폭탄의 피해자에 대한 이러한 전형적인 미디어적 재현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 까지도 일관되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원자탄 폭발 당시의 피해를 면한 잔존자들이 한국에도 존재하고 있다 는 사실이 어떤 계기로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 사회에 드러나게 되었을 까?앞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키니피재 사건이 터졌던 1954년 이후 히바쿠샤의 존재 가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게 된 일본 사회에 비해,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 적 존재가 잊혀진 것이나 다름없는 한국 사회에서 이 물음은 매우 복잡한 역사적, 지성사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원폭피해자들이 스스로도 자신들이 원자탄 폭발 당시의 피해를 면한 잔존자라는 자각을 한 것이 언제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극히 최근에도 “원폭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거나 “원폭피해자라면 꿍꿍 앓고 병신된 사람, 그런 사람인줄 알았지 우리같이 겉보기 괜찮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현실에서, 대중적인 신문에 이미 원자폭탄의 피해와 관련된 정 보들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바로 연결되 었다고 보는 것은 인식론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온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 물음은 한국 사회 내에서 원폭피해자라는 존재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 즉 구체적으로는 개별 원폭피해자들이 스스로 원폭피해자라는 자각을 하게 된 시기나 방식을 사회적 차원의 조직이나 연대체 결성을 중심으로 에둘러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현재 한국 에서 원폭피해자들로 구성된 유일한 결사체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전신인 한국원폭피해 자원호협회가 설립된 1967년이 그 기점으로 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자료에서는 1950년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한 일회담들을 계기로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를 호소하던 개인들이 있었다는 점도 나타 난다. 이는 1949년 이후 시작되어 여러 차례 토론과 중단을 거듭했던 한일회담이 전후 보상 문제를 다루고 있었고, 1957년 제4차 한일회담 예비회담과 이듬해 제4차 한일회담 등이 진

행될 당시에는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재산청구권, 거류자 상호석방, 문화재 반환 등이 주 요한 주제가 된 만큼 원폭피해자 문제에 자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한국 원폭피해자의 실태를 다룬 기사와 한일회담에서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다뤄줄 것을 한국정부 외무부에 호소하는 곽귀훈의 글이 게재됐다.102) 1963년 봄에는 이종 욱과 오남련이라는 부부가 개인 자격으로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 대사관과 일본대표부, 그리고 신문사 등에 원폭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호소하는 탄원서와 진정서 등을 보내 보상 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103).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원폭피해자 조직이 일찍부터 결성되었다는 증언도 있다.103) 1959년 즈음의 일로 히로시마에서 귀환한 합천 출신들을 중심으로 원폭피해자 모 임이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한일회담 등에서 다루어질 피해자 보상 문제를 논의하거나 선전 활동을 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에 대한 문서상의 기록을 한국원폭피해 자협회나 다른 책 혹은 개인적인 수기 등 다른 곳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임의 명칭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다.

한편 합천 모임이 결성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우연찮게도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가 1960년경부터 자주 민단에 도착”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1997)의

『민단50년사』히로시마지부 편에 따르면 실제로 민단은 이를 계기로 1963년 3월 1일에 히 로시마지부가 중심이 되어 <모국피폭동포구원대책위원회>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965년 한일회담 타결을 앞두고는 한일 양국 정부가 회담에서 한국원폭피해자 문제를 다루어줄 것 을 호소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민단의 히로시마 현 본부는 1965년 일본에 있는 단체/개인으 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기 위해 <재한 102)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9년 1월, 일본에 주일대한민국외교대표부를 설치한

한국정부는 그해 초부터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준비하며 대일배상조사심의회를 설립한다. 하지만 한국 전쟁의 발발 등으로 회담의 진척이 늦어져, 1952년 10월 1차 회담을 시작으로 53년 제2차 한일회담, 55년 제3차 한일회담, 57년 제4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58년 제4차 한일회담 등이 진행된다. 이 회담 들에서는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재산청구권, 거류자 상호석방, 문화재 반환 등이 주요한 주제가 되었 다. 그러나 그 또한 난항을 겪다가 1960년 4월 15일 제5차 한일회담이 중단되고, 한국 사회는 다시 4·19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으며 격랑 속에 빠져들게 된다.

103) “보내주신 기록에 59년에 합천 피해자 모임 이야기를 써 놓으셨던데, 시기가 확실한가요?”(연구자)

“맞아요. 당시에 사람들이 모여서 보상 문제를 논의하고 그랬는데, 한 달에 몇 십 원씩 내고 모였어요.

근데 자식들한테 피해가 있을까 걱정해서 가입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어요. 저는 그때 어머니가 권유 해서 제일 어린 나이에 가입을 한 셈이지요. 59년은 확실한 연도인데, 제가 그때 57년에 경찰서 통신 관련 일을 하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가입했거든요. 사람도 몇 명 없어서 처음엔 몇 십 명 정도였고 나중에 백여 명 됐나. 주로 선전활동을 했어요.” (1941년생, 김종철, 경남 창원) 경남지부에서 협회 지 부 일을 담당하고 있는 김종철씨의 위 이야기는 합천에 살고 있는 다른 회원과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합천모임이 협회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던데요.”(연구자) “그게, 육이오 후고 내가 스 무 살 넘어서 서른 정도 되었을 때니까, 맞아요. 협회 있기 전에. 그거는 협회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노홍규라는 사람이 집에서 일을 보면서 한 거지. 노홍규, 최성춘, 정기장 그런 사람들이에요. 정기장씨 는 면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글을 잘 했어요. 근데 그건 사무실도 없고, 최성춘씨가 식당을 조그맣게 했 는데 거기서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고 그랬지. 노홍규씨가 초대 지부장을 했어요. 합천에는 히로시마 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1933년생, 남, 이재석, 경남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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