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2) 히로시마 한인사회와 모국피폭동포의 연결
한국원폭피해자와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결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운동사적 측면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이는 식민지 시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의 조선인 이주와 귀 환, (귀환 이후 일본으로의) 재입국 등을 통해 형성된 재일한국인 커뮤니티와 귀환 동포(한 국 거주 원폭피해자)들 간의 친인척간 연줄망이라는 차원에서도 깊은 뿌리가 있다. 특히 이 부분은 강제동원 부분에 초점이 많이 맞추어진 기존 연구들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점이다.
앞서 이미 언급했던 민단의 <모국피폭동포구원대책위원회>의 방한은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를 일본 시민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기가 된 사건 중의 하나다. 이들의 방한 소식은 일본 시민사회 내에서 “한국에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이들이 있다”
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처음 공식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나가사키에서 나가사키증언 회를 만들고 오랫동안 반전반핵평화운동을 해온 가마다 사다오(鎌田定夫) 교수는 민단의 방 한에 대해 “1965년 6월 한일 기본 조약의 체결을 전후해 일본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 의 전쟁 책임 문제가 부상하고 마침 베트남 전쟁이 개시되어 일본 내 반전평화운동이 활발 하게 전개되던 때에 민단의 한국 피폭자 실태조사가 신문에 실리면서 처음으로 외국인피폭 자 특히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広島・長崎の証 言の会·在韓被爆謝医療調査団, 1986).
그러나 민단 히로시마본부 재한피폭자실태조사단의 방문은 단순히 조직적 운동 차원의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당시 이 조사단의 방한은 히로시마의 재일한국인 커뮤니티의 모 국 연줄망122)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1964년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이루어진 민단의 ‘본국 가족초청사업’도 한국원폭피해자와 히로시마의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모국 연줄망을 보여 주는 한 사례다. 당시 이 ‘본국가족초청사업’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주재하고 있는 교 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가족 중에 히바쿠샤가 있었는데, 정확하게는 열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민단의 본국가족초청사업에 히바쿠샤가 포함된 것 은 우연이 아니었다. 앞서 민단의 모국내 피폭동포구원대책 관련 사업의 개시를 언급했듯이, 민단은 그 사업의 일환으로 1964년 동경올림픽 개최 당시 본국가족초청사업에 피폭자를 포 함시킨 것이었다. 그 중 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박모씨가 민단과 일본 주재 친척의 도움으로 후생성에 피폭자건강수첩의 교부를 신청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후생성은 히로시마 시에 서 피폭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수첩을 교부하라고 지시한다. 그렇게 박씨는 수첩을 교부 받아 히로시마 적십자(日赤)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히로시마도 방문해 ABCC에서 진찰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사연 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1997).
이렇게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결성되기 이전부터 지속 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원폭피해자 문제와 관련된 양국 시민사회의 연결에 있어 중요한 역 할을 해나간다. 그 중에서도 히로시마의 재일한국인 커뮤니티와 한국원폭피해자들과의 연결 은 식민지 시기 히로시마로 이주하기 전 고향의 친인척 혹은 지인이라는 지역적 연고와 밀
122) 이들 사이의 연줄망에 대한 자료는 합천 출신의 원폭피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원 폭피해자들의 치료를 위한 합천진료소를 마련하는 것, 히로시마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 건립 추진 등 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기 합천보건소 개소할 때 우리 오빠도 나오고 부인회 하는 언니 도 물건 보내고 그랬어. 다들 나와서 약품도 가져오고 그랬어. (그 일도 아시면 아주 일찍 이 일을 보 신 건데, 회원 가입은 안 하신 거네요.) 네, 몰랐지요. 이게 뭐 하는 건지. 우리 오빠가 친정집 산소 돌 본다고 자주 나왔어도 저는 이런 문제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오빠가 돈 좀 잘 벌던 때고, 빠 징코 사업을 하니까. 자주 오고 돈을 보내던 때인데. 또 그 위령비 세울 때에도 돈을 많이 내고 민단에 서 그걸 찬조해서 했잖아요. 그것도 다 합천 사람들이 민단에 있으면서 한 거잖아요.”(김선이, 여, 1929년생) 같은 증언들은 합천 출신 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 간간히 나온다. 협회 기록에는 지역 출신 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지만, 부인회나 민단과의 교류 속에서 물자지원이 있었다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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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앞의 민단 히로시마현 재한피폭자조사단의 일원이었던 강문희는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 에바(江波) 공장(폭심지에서 4.6km)에서 근무 중 피폭된 ‘히바쿠샤’로서, 그의 처가가 합천이었다. 또한 민단 히로시마본부의 주요 간부들 중 에서도 합천 출신들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다. 강문희씨는 첫 방문 이후로도 민단 히로시 마현본부 내 모국피폭동포구원대책위원회(이후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로 개칭) 위원 장으로서 와병중인 최근까지도 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히로시마에서는 재한원폭피해자대 책 등을 지원했고, 1970년대 중반에는 합천의 원폭피해자진료소 건립에 힘썼다.123)
한편 이 같은 지역적 연고에 기반을 둔 교류가 일본의 시민 활동가나 단체들의 한국원 폭피해자와의 연결과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간의 교류는 그 성격에 있어서 정치적인 색깔이 훨씬 더 옅어진다. 송금을 통한 경제적 지원, 서신을 통한 일상적 정보 교 환, 그리고 무엇보다 '원폭수첩' 취득에 필요한 일본 체재 시 주거지 제공과 '증인' 역할 등 이 특히 히로시마의 재일조선인 커뮤니티 혹은 재일동포의 존재로부터 가능했던 것들이다.
언어적 차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원폭피해자운동이 태동하던 초기에 이 문제 를 일본 시민사회에 알리고자 적극적이었거나 혹은 일본의 시민 단체 혹은 활동가와 연계 하고자 했던 한국원폭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일본에서나 혹은 식민지 조선에서 소학교 이상 의 교육을 받은 이들로서 문어나 구어적 측면에서 일본어 구사가 가능했던 이들이었다. 일 본 ‘세정’(世情)에 밝아 일본 시민 단체 혹은 활동가들과 직접 교류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등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스스로 개진하는데 무리가 없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이 는 역으로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통역을 통하지 않고서는 직접 교류 가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언어적 장벽에 부딪치게 된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어 떤 방식으로든지 그 장벽을 넘을 만한 경제적, 시간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친인척 연줄망에 기반을 둔 교류에 있어서는 당연히 언어적 장벽이 구애될 것이 없었 다. 물론 앞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위 두 가지 형태의 교류가 완전히 별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 사이에서 재일교포들의 지원이 일본 시민사회 진영과 한국원폭피해자 간의 교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피폭된 뒤 한국에 돌아온 이들이 한국원폭피해자운동의 주체가 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시민단체와의 연대가 어딘가 매끄럽지 못하게 된 현실을 본다면, 이 두 형태의 교류가 갖는 언어적/문화적 측면 에서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123) 2007년 8월 5일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한국원폭피해자 위령제에서 강문희씨를 만났을 때, 그는 와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참석해 추도문을 읽었다. 히로시마평화공원에 위치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의 피폭자증언비디오자료(平和データベース)에서 한국원폭피해자로서 처음 증언한 그의 피폭체험과 활동을 참조할 수 있다. 한편 이날 열리는 위령제는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 설치된 ‘한국’
원폭희생자위령비 앞에서 민단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위령비와 위령제가 식민지 시절 이들을 지칭했던 용어였던 ‘조선인’이 아니라, 탈식민 이후 남한 정부에 속한 국민을 이르는 ‘한국인’(원폭희생자)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게 된 경위와 이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억의 정치와 투쟁에 대해서는 Yoneyama(1999, Chapter 5)를 참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 사회에서 자이칸히바쿠샤, 즉 한국원폭피해자의 존재가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한일협정이 이루어지던 1965년을 즈음한 기간 동안 양국 시민사 회 간의 '연결'은 시민사회 운동 진영 인사들과의 사회적 연줄망 그리고 기존에 형성되어 있었던 히로시마의 재일한국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간 연줄망이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 토대는 식민지 시기의 ‘내지’와 ‘조선’으로의 이주와 귀환, (한국원폭피해자 들의 경우는 특히) 귀환 이후 밀항을 통한 재(일본)입국 과정 등을 겪으면서 형성된 한국원 폭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운동가들의 사회적/인적/문화적/교육적 자본 등에 깊은 사회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같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이후 일본의 시민 사회 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보다 직접적인 호소들에 응답하는 배경이 되고, 한국 정부의 원폭피 해자 원호에 대한 무관심 및 방치와 맞물려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물 꼬를 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