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한국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범주로의 편입 과정
2) 디딤돌과 문턱으로서의 협회
- 177 -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혹은 그 하부 조직으로서 지역별 지부145)는 그 같은 경제적/의료적 혜택을 얻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피폭자가 뭔지도 모르는 한국”에서 협회는 이들에게 필요한 일본의 사정을 듣고 관련된 정보를 얻으며, 그것의 현실 적 실행의 형태가 “결국 그게 뭐하자는 소리인지”를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 본의 사정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 원폭피해자들에게 협회, 그리고 이의 지역 하부 조직인 지부는 자신들과 관련된 정치사회적 쟁점이나 제도적 지원 등이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많은 경우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히 바쿠샤의 경계 넘기는 이 협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물론 4장 2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본 시민사회 단체와의 연대나 친인척 연줄망에 기반해 일본과 연결되어 있는 특 별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또한 오랫동안 협회나 지부와 별개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개별 원폭피해자들의 히바쿠샤의 경계 넘기의 시기와 방식은 이들의 협회 가입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많지는 않았다.
협회가 설립된 초창기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모으던 시절 협회 회원은 “누구네 친척, 누구네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이진선 씨는 원폭협회 설립 당시 회원이다.147) 협회 창립 인사가 합천이 고향인 그녀의 친척이었다. “아버지 사촌 간들, 종조할아버지네, 올케네 친정 가족” 할 것 없이 “집안사람들 모두 히로시마에 갔다 온 이들”이었다. 이런 사정은 협 회가 설립된 이후 10여 년 간 줄곧 비슷한 사정이었다.
(그럼 어르신 원폭 협회는 언제 가입하셨어요?) 내가 합천에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갔거든요.
78년도 그때 가입했는데, 그 전에는 그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가 대구 내당동 살면서 빨래를 하 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어요. 우리 엄마 택호를 부르면서 “독배기실네 신동댁 딸이 누굽니까” 하 고 물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내다보니까 나를 찾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우리 어머니 일가(一家)라. 강대술 씨148)가 찾아서 보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보니까 일본 사람 세 사람이 나와 있대요. 그래서 그때 가입했어요. 합천 지부 지부장하던 안영천 씨가 우리 집안사람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대구로 갔으니까 소식을 잘 몰랐던 거지요. 우리가 전쟁 후에 대구로 나갔으니까 요....(중략)... (강대술 씨는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외가쪽 일가에요. 우리 엄마가 강 씨잖아요.
(히로시마) 고이(己斐)에는 안 씨, 강 씨가 많았거든요. 그 일가들이 많았어요. 전 씨들도 좀 많았 고요. 그 사람들도 (합천군) 쌍책 사람인데, 서로 서로 결혼하고 하니까 일가고 그랬지요. 다들 노동일 하고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삼촌이 조금 일찍 일본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던 사람이라 그 관계로 사람이 많이 왔어요. 근데 우리 삼촌은 시체도 못 찾고 그 가족도 다 죽어버렸어요. 원래 는 에바(江波)에 살다가 고이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됐었는데, 그 삼촌이 공사를 떼어서 일을 하 는데, 그 사람들이 다 일가친척이에요. 그 날도 사오십 명 데리고 시내에 일 나갔다가 다 죽어버 렸어요. 사실 그때는 전쟁이 심하니까 시골로 피난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히로시마는 공습이 직접적으로 없기도 했고 시골로 가면 일을 못하니까 우리는 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다들 그 근처에서 살았어요. 우리는 히로시마는 안전하다고 봤어요. 비행기는 지나다녀도 폭격은 없으니 까. 또 고이는 시내 중심도 아니고. 오히려 딴 데 사는 사람도 불러들였는데 뭐. 우리 아버지가 그 해 나고야(名古屋) 있던 사람들도 불러오고 그랬어요. (한일순, 여, 1930년생)
한일순 씨가 협회 대구 지부의 지부장이던 친척으로부터 회원가입을 권유받은 시기는
적인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다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비추어 정기적으로는 아니어도 모임을 할 때 돈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47) 그녀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토목 일을 하고 있던 남편을 찾아 히로시마로 건너간 것은 1920년대 중 반이었다. 1927년 오빠 정규가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그 아래 형제는 모두 일본에서 태어났다. 소학교고 등과 2학년 때 군수공장인 동양공업에 학도 동원되어 군용기 부속품 만드는 일을 하다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원폭을 맞았다.’
148) 강대술 씨는 1917년생으로 합천군 쌍책면에서 태어났다. 한일순 씨가 회원 가입하던 1970년대 이 후 줄곧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대구지부 사무를 보아 왔다. 그의 아버지는 합천군 쌍책면 출신들이 히로 시마로 이주하는데 중요한 매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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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이었다. 손진두 소송의 최고재판소 판결을 전후로 한일양국정부 사이에서 한 국원폭피해자와 관련된 문제가 잠시나마 사회적 이슈가 된 때여서, 한국원폭피해자가 일본 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소식도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일 양국 정부에 원 폭피해자문제 해결을 촉구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맞은 협회로서는 “회원 수가 많아야 대정 부 압박”에 힘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회원을 모으던 시절이었고, ‘도 일치료’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 회원 가입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됐던 때이기도 하다. 미디 어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가입한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회원들은 대체로 혈연과 지역을 연고로 한 연줄망에 기대어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혈연과 지역을 연고로 한 연줄망이라는 것은 회원 가입 당시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히로시마나 나가사 키로 이주하던 시기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1980년대 일시적으로 운영된 도일치료 제도가 정부간 합의에 따른 것이지만, 협회는 도 일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고 인솔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한국 정부는 이 시기 에 도일치료에 필요한 도항비를 제공했지만 도일치료자 선발은 전적으로 협회에 일임되었 다.149)
이렇게 협회 회원들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의료적 지원이 생겨나면서 이전까지 거의 임 의가입형 단체였던 협회는 느슨한 가입제한형 단체로 변화한다. 협회의 회원 가입 요건이 이전보다는 좀 더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협회에 가입하기 위 해서는 피폭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나 두 명의 증인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이러 한 변화는 협회가 보관중인 회원카드 기록에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보관하고 있는 회원카드는 1983년도부터 작성된 것인데, 1980년 도일치료를 계기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서 체계적인 회원관리의 중요성이 제기되어 도입 된 것이다. 카드에 적어야할 내용들은 일본에서 피폭자건강수첩을 받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것들과 거의 유사한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피폭관련사항(피폭 당시 상황, 피 폭당시 같이 있던 사람, 피폭 직후 상황, 피폭 후 상황)과 피폭 후 후유증(재일 당시 후유증, 귀국 후 병력, 피폭 후 출산력, 현재 건강상태 및 요망사항), 두 명의 보증인 서명과 필요시 보증서(호적, 주민등록 등본, 일본에서 발행한 피폭자건강수첩 등). 그 외 기본적인 인적사항 이외에 눈에 띄는 것은 도일과 관련된 사항(도일시기, 도일사유, 귀국시기, 재일당시 거주지 주소 및 상황, 재일시 가족현황)을 적는 란이다. 당시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카드에 관련된 내용을 적고 두 명의 보증인 서명과 증명서를 첨부해 협회 임원의 간단한 심사를
149) 1980년 도일치료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인 2월 29일 협회는 일본 측의 관계자들과 재한피폭자 도일치료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다. 도일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인원에 한정이 있었으므로 이들을 선정 해서 보내는 책임이 협회에 주어졌고, 10월 27일 도일 치료를 위한 도항비가 국고보조금으로 지불되 어, 협회는 이를 집행하는 것과 관련된 실무도 담당했다. 한국 정부와의는 협의를 통해 일시적이긴 하 지만 국고보조로서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무료치료를 지원받기도 했다. 치료를 받는 것 또한 회원들에 게만 주어지는 혜택이었다.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회원 가입의 역사에서는 ‘구가 입자’들이 들어오던 때로 이야기된다. 앞서 70년대와 마찬가지로 언론보도를 통해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 보다는 친인척들과의 연줄망 속에서 원폭피해자 구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런 협회 회원 가입의 양상은 1987년 협회 주도로 이루어진 23억불 보상청구운동을 계 기로 크게 변화했다. 협회는 각 지부에 회원 가입을 독려했다.
(합천을 제외하고) 경남 사람들이 원래는 부산에 등록을 했다가 (89년) 이때 처음 경남 지부 를 만든 거예요. 우리 지부 설립할 때는 <시민회> 회장 마츠이 요시코 씨하고 가와이 아키고, 그 리고 선린교150)에서도 도와주고요. 그때 우리가 부산에 같이 있다가 나눠져서 나올 때 100명 정 도 명부를 줬거든요. 그리고 제가 그만 둘 때는 300명 정도 됐고, 돌아가신 분이 100명 정도 되 고. 그리고 우리가 이걸 세우고 회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울산으로 밀양으로 진주로 하동으로 다 돌아다니면서 모았어요. 고성에도 사람이 많아서 거기도 가고 거제로 통영으로 돌아다니면서 광고도 많이 하고, 우리 지부 하는 일도 알려주고 연락도 하고 그렇게 하고 다녔어요...(중략)....그 당시는 심사해서 협회 회원으로 등록을 해주던 때거든요. 합천 사람들은 예전부터 했었으니까 자 동으로 된 게 많았는데, 우리는 신규로 다 하니까 심사를 해서 등록을 해줬어요. (김일선, 여, 1932년생)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협회의 23억불보상청구운동이 한창이던 1988년 11월 신설된 경 남지부의 초대 지부장을 지낸 김일선 씨는 일본 <시민회>와 일본신흥종교법인 <선린회>의 도움을 받아 경남 곳곳의 회원들을 찾아다녔다. 퇴직 전 공직에 있었던 남편은 협회 가입에 필요한 회원들의 서류 작업을 도왔다. 이 시기는 경남지부 뿐만 아니라 호남지부도 신설된 때로, 일본의 시민단체들에서도 원폭피해자 구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해 회원가입을 하 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데 힘쓰던 시기다. 회원들을 찾아다니던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임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네 아는 사람이 히로시마에 있었다”거나
“친척 중에 히로시마에 같이 있었던 사람”, “같이 징용 간 사람이 어디에 있었다” 등과 같 이 실제 찾아가는데 실마리는 여전히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꼬리물기 식으로 찾아다 니는 경우가 상당수를 이뤘다.
이처럼 협회의 회원가입 독려 활동과 노태우 정부 수립 이후 선거 공약이었던 보상 교 섭이 가시화되어 그에 대한 언론 보도가 크게 늘어난 1990년 전후는 협회의 역사상 가장 150) 일본의 신흥종교 법인체인 선린회(善隣會)는 1920년 교조인 리기히사(力久辰濟) 씨가 식민지 시절 서울의 삼각산에서 입산 수도 끝에 득도했다는 인연이 있어 이곳을 성지로 지정해 매년 교도들과 성지 순례를 한다. 1974년 손진두 소송으로 한국원폭피해자문제가 한일 사회에 알려진 가운데 이들은 종교 가적 양심과 선린회의 교지에 입각해 한일간의 정책적인 해결에 앞서 우선 민간차원에서 속죄하고 지 원에 앞장서겠다고 밝히며, 1974년부터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매년 협회에 지원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 르고 있으며, 매년 8월 6일에 개최되는 한국원폭희생자위령제도 후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