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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결: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초국경적 적용의 의의와 한계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85-189)

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6. 소결: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초국경적 적용의 의의와 한계

달'로 인해 피폭자건강관리 수당 등의 지급 등에 피해를 받은 모든 재외국민 히바쿠샤들에 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한 판결로 이어졌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위의 표 14번이 해당 소송). 또한 일본 사법부는 '402호 통달'과 시효 문제 등을 이유로 과거에 미지급된 피 폭자건강관리수당의 지급도 명령했다 (위의 표 8번이 해당 소송). 이로써 이제 한국원폭피해 자들은 일본의 영역과 거주관계를 갖지 않고도 히바쿠샤가 될 수 있게 되었고, 히바쿠샤의 시정권적 경계는 허물어지게 되었다.140)

2002년 곽귀훈 소송의 승소 판결은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수첩의 의미도 크게 변화시켰 다. 한국에서도 피폭자건강수첩을 소지한 히바쿠샤들에게 수당의 수급이 가능해지면서 수첩 은 이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들이 진짜임을 인증하기 위한 자격증이 아니라,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이 상정한 히바쿠샤라는 범주로 직접 편입되기 위한 ‘통 행권’ 혹은 ‘혜택’을 보장하는 ‘보험증’ 혹은 ‘연금증서’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수첩은 회원 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히바쿠샤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되었다.

- 171 - (국가의) 의무”를 언급한 것이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은 이렇게 그들의 고국이 자국민 보호를 위한 국가의 의무를 깨닫는 데 필요했던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자신들을 구제할 방도를 찾았다. 1967년 한국원 폭피해자원호협회(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한 이들은 한편으로는 한일양국정부에 대 해 자신들의 손상된 몸에 대해 배상해줄 것을 요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일본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장으로 편입되려고 시도했 다. 밀항(密航)과 합법적인 도일(渡日) 등과 같은 실질적인 월경(越境) 행위를 통해서 치료와 운동의 한 방편으로서 피폭자건강수첩 받기를 시도하다가 나중에는 일본 원폭피해자구호정 책의 핵심인 히바쿠샤의 시정권(施政權)이라는 또 다른 경계를 해체한 것이다.

그런데 연구자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운동 과정에서 이들이 원폭 투하의 책임은 미국에 그리고 전쟁 수행 주체라는 점에서는 일본에 그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 하고,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한일 양국 사이에 피해자 보상 문제는 해결됐으며, 이제 모든 피해자 보상 문제는 ‘국내 문제’라는 양국 정부의 입장에 따라, 그들의 주요한 활동의 대상 으로는 일관되게 한국 정부가 우선시 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한국원폭피해자들 이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장으로 편입된 과정은 이들의 구호와 관련해 사실상 한국 정부가 ‘부재’(不在)한데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헌법재판소의 뒤늦은 판결문에 적시된 바와 같이, 이는 ‘국가적 의무’의 방기에서 연유했다. 한국정부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여러 호소 에 대해 무시에 가까운 대응으로 일관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사회적 연대와 정치적 활동에도 끊임없는 제약과 감시를 행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배경 하에서 1960년대 후반 이후 줄곧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을 지배한 것은 ‘정치색’을 띠지 않아 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은 개별적 차원에서는 '자기검열'로, 조직적 차원 에서는 정보 당국의 직접적 감시로 이어졌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활동 또한 구호금과 인 도적 지원이라는 가장 안전한 방식의 교류 쪽으로 틀 지워져 나간다. 그러나 구호금이나 위 로금과 같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조치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에는 명 암을 뚜렷하게 남겼으며,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원폭피해자운동의 고립 및 정치사회적 보 수화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한국정부와 한국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활동에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시민사회였다. 물론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와 같 은 연대가 한국정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한 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당연 하다. 하지만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중심으로 보상청구운동과 특별법 제정운동이 한국 사회 와 정부의 일관된 무관심 그리고 일본 정부의 회피와 임시방편 속에 표류했다면, 피폭자건 강수첩 받기로 대별되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실천과 운동은 ‘손진두 소송’을 필두로 1990년 대 후반부터 진행된 소위 ‘수첩’ 재판들을 통해 명시적으로 그 효과를 내면서 한국원폭피해 자들이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장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의 장에서 국적 조항을 명기하지 않은 원폭3법은 한국원폭피해 자들이 피폭자건강수첩을 소지함으로써 ‘히바쿠샤’의 경계 안으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이 ‘히바쿠샤’라는 범 주의 경계 안에 편입되는 것 자체는 1990년대 후반까지 그 자체로 가장 중심이 되는 운동 의 수단은 아니었지만, ‘23억불보상청구운동’의 결과에 대한 낙담, ‘40억 엔의 인도적 지원 금’의 운영을 둘러싼 갈등과 잡음, 한국 원폭피해자들의 고령화 등으로 인한 운동의 동력 상실 등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수첩’의 교부와 그 효력의 문제가 이후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과 의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 기 속에서 일본의 <시민회>, <시민회의> 등에서 활동하는 시민활동가들은 1980년대 후반부 터 고양되기 시작한 전후보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법적 소송을 통해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자국의 원폭피해자구호와 관련된 국내법인 원폭원호법의 내외차별을 문제 삼으며 이를 자 이칸히바쿠샤 구호 활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론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수첩 재판들의 승소를 통해 한국원폭 피해자들이 ‘히바쿠샤’의 범주 안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 의미하는 바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제의 피해자’로서 보상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가 없다. 히로시마에서 한국원폭피해자 소송의 변호사로 활동해온 아다치 슈이 치(足立修一) 변호사 또한 “나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자이칸히바쿠샤를 원고로 한 소송에 임 할 때, 미쓰비시재판에서는 식민지주의 문제를 주장·입증해 왔으나,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시 키기 위한 논리 구성에서는 일본 히바쿠샤와의 차별시정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주장·입증해 왔다. 이 방침은 일본 재판소에서 승리 판결을 획득하기 위함이라는 관점에서는 꼭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한국 원폭피해자의 심정을 배려한 것인가는 재고를 요한다고 느 꼈다”(足立修一, 2012:46)고 한 말은 이 소송들이 갖는 의미와 한계들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원고가 된 일련의 수첩 재판들의 결과가 법적으로나 행정적 으로는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이라는 언설이 내포하는 식민지배와 전쟁에 대한 '피해보상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능하게 한 일본 시민사회 운동 진영의 노력은 분명히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호소에 응답하고 연대의 손길을 건넨 이들의 활동은 국가적 구도로는 과거 식민자와 피식민자 간의 관계였지만, 피폭을 매개로 한 이들 의 만남에는 언제나 ‘반성’과 ‘속죄’, 그리고 ‘위로’의 심정들이 강하게 결합했다.

또한 오늘날 수첩을 받아 히바쿠샤가 된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내외 차 별' 없이−일본에서 모든 ‘일반의 전재민’ 가운데 유일하게 '원폭'전재민만이 원호의 대상이 된 것과 동일한 논리로−직접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 사회의 다른 '일제피해 자'들과는 어느 정도 다른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일 양국 간의 과거사 문제가 종결되 지 않은 시점에서 많은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으로부터 받는 피폭자건강수당을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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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이 같은 독 특한 지위는 한국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일제'의 피해자보다는 '원폭'의 피해자로 규정하는데 방점이 찍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의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던 날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단체 차원에서 판결을 환영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한국 정부에 대해 강한 보상 요구 시위는 하 지 않았다. 같은 날 동일한 판결을 받은 위안부피해자들이 외교통상부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는데 동참하자는 요구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았다. 단체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 "

우리는 좀 다르잖아요?"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한국 정부 또한 일본 정부에 대해서 위안부 문제는 거론했지만 원폭피해자 문제는 적극 거론하지 않았다. 수첩을 받아 히바쿠샤의 경계 안으로 진입한 한 국원폭피해자들은 이제 말 그대로 ‘자이칸히바쿠샤’(在韓被爆者), 즉 일본 히바쿠샤가 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수첩은 이제 휴지조각도 아니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기 위해 자 신들이 진짜임을 인증하기 위한 자격증도 아닌, 일본의 원폭피해자구호정책이 상정한 히바 쿠샤라는 범주로 직접 편입되기 위한 ‘통행권’ 혹은 ‘보험증’, 그리고 ‘연금증서’와 비슷한 의 미를 지닌다. 이제 수첩은 협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히바쿠샤가 되기 위해 필수 적으로 소지해야 하는 증명서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일본의 히바쿠샤가 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피폭자 건강수첩의 교부라는 특정한 관료제적 통과의례(bureaucratic rite of passing)(Kravel- Tovi, 2012)를 거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일본피폭자건강수첩 교부 과정을 통해 일본의 히바쿠샤의 경계 통제가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경험되며, 왜 이러한 관료제적 통제가 특정한 부류의 원폭피해자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구 조화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85-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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