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원폭피해자 운동의 역사와 일본 히바쿠샤 원호의 초국경화
2)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결성과 초기 활동의 방향
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전신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의 초창기 멤버들이 협회 창립 을 도모하던 것이 바로 이 한일협정 직후의 일이다.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에 의식이 생긴 몇몇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존재, 신생 한국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 구소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한국원폭피해자 연구의 언론 발표,105) 민단 히로시마현 본부의 모국 방문 당시 한국원폭피해자와의 만남 및 한국 정부에 대한 실태조사 의뢰 등이 협회 결성을 추동하는 복합적인 계기로 작용했다.106)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후 20여 년이 지난 1966-67년의 일이였다. 1967년 1월 27일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준비모임 사무실이 서울 용산의 한 작은 건물에 설치되고, 곧 사람들에게 이들의 존재를 알릴 공고문 이 게시됐다.
공고문107)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양 시에서 원자폭탄으로 상처받은 우리 동지 들에게 공고하나이다. 우리는 8·15 이후에 상처받은 몸으로 조국의 품안에 들어와서 어언 20여년 성상이 지났어도 우리의 상처는 가실 줄을 모르고 악화 일로에 있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없이 와석횡사의 지경에 있습니다. 우리의 딱한 처지를 스스로 타개하여 나가기 위해 우리의 상처치료 는 물론 재활의 방도를 도모하고자 피해동지들의 신상 및 상황을 파악코자 하니 피폭자들은 빠 짐없이 참가하여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105) 1965년 한국방문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한국원폭피해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온 히라오카(平岡 敬) 전 히로시마시장의 개인적 회고에서 자신의 첫 한국방문의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한국원자력 원 방사선의학연구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원폭피해자 조사를 하게 된 계기가 나온다. 「한국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 안치열 소장은 그들이 한국원폭피해자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진 계기를 말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1963년 8월 6일에 연구소 연구원 중의 한명이 “오늘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이다. 한국에도 당연히 피폭자가 있지 않을까”하며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화제가 되어 연구소 에서는 이 문제를 실제로 조사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연구소는 이를 계기로 전국의 보건소와 도립병원을 통해 한국 내에 있는 피폭자 조사를 해보기로 하고 공고를 냈는데, 이를 통해 처 음으로 203명이 등록을 했다」 (平岡敬, 1988:15).
106) 초창기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창립 배경에 대해서는 이치바 준코의 『한국의 히로시마』(2002, 역사 비평사),『한국원폭피해자65년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에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 국방사선의학연구소의 원폭피해자 연구 조사를 계기로 1966년 8월 6일부 중앙일보 제4면에 한국원폭 피해자에 대한 기사가 당시로서는 가장 포괄적인 정보를 담고 최초로 개시된다. 그리고 이틀 후 8월 8 일 오후 10시 반에는 동양TV에서 한국원폭피해자에 대한 좌담회가 방송 됐다. 학계와 언론계, 보사부, 적십자사,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 등의 대표자들과 피해자대표 3명이 참석했다고 보고된다. 이 두 개의 미디어 보도는 모두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연구조사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한국 내에 존재하는 원 폭피해자의 실태에 대한 중앙 언론의 이러한 보도는 서울에 거주하던 원폭피해자들의 자각과 연대체 결속 움직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07) 이 공고문은 아사히신문에서 1975년 출간된 『피폭한국인』에 게재된 일본어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설립취지문을 번역해 실은 것이다. 전문은『한국원폭피해자65년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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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동지들의 신상 및 상황을 파악코자 한 이 공고문은 1967년 2월 1일 각지의 원폭 피해자들에게 모임을 선전하자는 취지에서 서울신문 등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다. 한국에서 는 원폭피해자들이 최초로 그들의 존재를 대내외적으로 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같 은 해 2월 11일 발기인 회합을 가진 15명의 참석자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군 측의 원 자탄 투하로 인하여 양성 또는 음성적으로 신체상의 피해를 입었거나 사망한 대한민국 국 민에 대한 각종 실태조사, 원폭병의 치료가능성 연구, 피폭자에 대한 치료알선, 사망자에 대 한 보상과 생존자에 대한 원호를 행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한 뒤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이하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7월 보건사회부로부터 법인허가를 받아 공식적인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989:7, 19).
그 전에 우리는 원폭이라는 것 ‘원’자도 몰랐어요. 삐까단108)이다, 그런 말이나 했지. 그런데 그때 보사부에서 우리 원폭피해자 실태를 조사한다는 소식이 라디오랑 신문에 났어요.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등록을 했어요. 그게 65년인가 그래요. 근데 그거 등록을 하고도 일 년이나 지나도 아 무런 소식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가 원폭협회를 만들자 하게 됐는데, 그때는 자갈치 시장 같은데 벽보를 붙여서 원폭피해자는 신청해라 하는 광고를 하고 그랬어요.
정보부에서 조사도 나오고 그랬어요. 시절이 그렇잖아요. 그렇게 해서 67년에 부산에서 발기를 하 고,109) 제가 부산지부 초대 지부장을 맡게 됐어요. 근데 처음에는 이 원폭이 뭣인지도 모르고 하 니까 무작정이에요. 사람들을 죄다 찾아다녔어요. 그때는 원폭 피해자들 중에 심한 사람은 나병환 자다 폐병환자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숨어서 있을 때라, 우리가 산 너머서도 찾아다니고 해서 만 든 거예요. (엄분연, 여, 1929년생)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결성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존재로서 원폭피 해자의 부상을 의미했다. 나병환자라는 따가운 시선 혹은 귀환동포라는 편견 속에서 운명이 나 개인적 불운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던 고통과 비참함이 “일본 군국주의가 창궐하는 히로 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라는 잔악한 괴물에 희생되어 평화의 사도로서 역할 을 완수했으나 그에 의해 무고한 수십만 시민이 참혹한 죽음을 맞고 불치의 상처에 신음하 는 일대 비극”(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설립 취지서)이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은 이제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개인적 운명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책임의 영역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원폭피해자라는 존재에 대한 정치사회적 책임은 어디로 향했을까? 108)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처음에 강렬한 빛이 ‘번쩍’한 뒤 '둥'하고 터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 본어로 "삐까돈-”(ピーカードン)이라고 하는데, 한국원폭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삐까단', '삐까탄'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109) 1967년 1월 27일에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발기인 회합이 있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1:108).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설립 취지서에 나온 요구 사항을 잠시 살펴보자. 한국원폭피해자들이 그들의 피해에 대한 정치적 책임 소재를 명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요구서는 몇 가지 주 목할 만한 점이 있다.
요구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설립취지서110) 중에서)
(1) 국내
1. 위급한 원폭병 환자에 대한 의료보호 2. 빈곤피폭자에 대한 특별 경제보호 3. 피폭자에 대한 적정한 권위 있는 진단 4. 병원, 요양소, 재활센터 건설을 위한 토지 공여
5. 피폭자에 대한 의료 및 경제적 원조를 위한 특별법 성립 6. 본 협회의 활동에 대한 경제원조
(2) 국제
1. 일본-병원, 요양소, 재활센터의 건설기금 및 원폭투하에 의한 신체적 장해에 대한 배상요 구
2. 미합중국-병원, 요양소, 재활센터의 건설을 위한 자재
위 원폭협회설립취지서에 게재된 요구에는 모두 세 개의 국가가 나온다. 우선 이들은 자 신들의 피해에 대해 일본 측의 책임을 물었다. 특히 원폭증으로 인한 신체적 피해를 치료할 수 있는 치료센터 걸립이나 신체적 피해에 대한 배상 문제 등에 대해서는 한국 외무부가 일본 정부 측에 요구해줄 것을 꾸준히 호소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으로 보 상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 ‘한국 정부에서 먼저 제의해 오면 인도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하겠 다’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상 일본 측이 먼저 스스로 그 문제를 제의해주지 않는 한 곤란하다’라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실상 일본 정부가 한국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강수원, 2000).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결성 초창기에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원폭투하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보상을 요구한 점도 중요하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게 병원과 요양소, 재활센터의 건설과 관련된 자재를 요구하 며, 관련 호소문이나 집회를 열 경우에는 반드시 미 대사관 측에도 그 내용을 알렸다. 주한 미대사관측도 원폭병원을 지어주기 위해 주한미국인, 미군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일 계획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경향신문, 1968년 10월 3일). 1971년 8월 6일 조계사에서 위령제가 110) 이 취지서는 아사히신문에서 1975년 출간된 『피폭한국인』에 게재된 일본어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설립취지문을 번역해 실은 것이다. 전문은『한국원폭피해자65년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2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