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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입양법제의 공백

(1) 수령국 현황

1950년대까지도 아동보호를 위한 입양법제는 미국에서도 생소한 것이 었다. 1851년 미국 매사츄세츠주에서 최초의 근대적 입양법이 성립되었 다고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국제입양 은 실제로 발생하지도 않았고, 각 주정부 차원에서는 국제입양에 대한 법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151) 영미법계에서는 후손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입양제도의 전통이 없었으며, 당시까지도 갈 곳 없는 고 아에 대한 해결책은 도제로 키우거나 시설에서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152) 국제입양 아동의 증가는 미국내에서도 입양법제의 변화의 필요 성으로 이어졌다.

(2) 송출국 현황

한국의 민법은 종법제에 의한 가(家)의 계승을 위한 ‘양자제도’가 가 족법 전통으로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었다. 한국 전쟁 직후는 민법이 제

151) Carlson, R., “Transnational Adoption of Children”, Tulsa Law Review, vol.23 (1988), p.323.

152) Id., p.322.

정되기 전이며, 일본 식민통치기간 동안의 조선민사령이 조선 관습법 전 통으로 회귀하는 시기였다.153) 서민층에서 수양자 혹은 시양자와 같은 혈연 관계 외에도 아동을 입양하는 관행이 있었으나, 이는 법률상 인정 되지 않았고, 친자관계를 발생시키지 않았다.154) 결론적으로 당시의 한국 의 입양법제 하에서는 근대적 의미에서 아동보호를 위해 가족외 입양을 규율할 수 있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아동을 외국인이 입양할 수 있는 법적근거는 미비한 상황이었다.

. 해리 홀트와 한국 혼혈고아의 미국입양

송출국과 수령국 법제의 공백상태에서 한국 전쟁중 아동의 국제입양 의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 사람은 Holt라고 하는 미 오레곤 주의 평 범한 농부였다. 종교적 믿음과 전쟁과 가난으로부터 고아를 구하겠다는 자선적 동기가 법적인 공백을 대치하면서 매우 강력한 동력으로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의 아동의 국제입양을 추진해 갔다.155) 당시까지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제도와 절차를 만들어 냈다. 해 리 홀트라는 개인의 활동은 이후 60여년간 전세계 수십만명의 국제입양 아동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고아입양법제의 틀을 마련하는 결 과를 낳았다.156)

전후 한국에는 미국과 유럽의 자선단체, 종교단체, 개인 자선사업가들 이 밀려들어왔다. 이들과 함께 서구에서 대규모의 아동을 수용하는 고아 원 방식이 함께 들어왔다. 한국정부는 해외에서 민간기관들로 부터 들어 오는 원조물자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10월 전쟁 중 외국으로 부터의 원조물자나 국가지원을 받는 후생시설의 통제와 감독을 위해 보 건사회부의 훈령으로 ‘후생시설운영요령’ 준칙을 발표했다. 이 준칙 중 제4장에 ‘후생시설에 수용된 어린이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원하는 사람

153) 변용찬 등 (1999), supra note 116, p.45.

154) 김주수 (1960), supra note 33, pp.335-354.

155) Holt, B., Bring My Son from Afar, (Holt International Children’s Service, 1986); 홀트아동복지회, 『홀트50년사』 (2005) 참조.

156) Winslow (2012), supra note 59.

에게 위탁하여 양육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있었고, 당시 입양관련 법 제의 미비 속에서 이 조항이 아동의 입양에 대한 최초의 근거가 되었 다.157)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전쟁 중 출생한 한국에 주둔한 외국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의 국외입양 추진을 위해 보건사회부 내에 ‘한국아동양호회’라는 기관을 만들었다.158) 정부는 혼혈 아동에 대해서는 미국등 기타 우방국에 입양하는 것이 이들의 ‘행복한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정책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한국아동양 호회 외에도 홀트씨양자회, 성육원, 천주교구제위원회, 국제사회봉사회 등을 해외입양을 추진할 수 있는 기관으로 허가하고, 이를 통해 외국으 로 입양하는 아동들의 현황을 관리해왔다.159)

입양기관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법과 절차도 없고, 경험도 없이 아동

157) 정기원・김민지, 『우리나라 입양의 실태분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3), p.155; 보 건복지부, 『2002 아동복지사업안내』 (2002) p.32; 홀트아동복지회 (2005), supra note 153, p.123.

158) 대한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50년사』 (2004) p.39. 한국아동양호회의 후신인 대 한사회복지회의 50년사에 따르면, 설립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국일민주의’ 즉 한나 라에는 한 민족만이 살아야 한다는 개인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혼혈아동의 문제를 국외입양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국가의 정책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관 미국이민법에의한

1957년 1월말까지 출국자수

임시특별법에 의하여 1957년 1월부터

11월까지

신이민법에 의한 2월이후

출국자수

수속

한국아동양호회 361 7 - 180

홀트씨양자회 480 - 280 110

성육원 103 - - 20

천주교구제위원회 70 - - 162

국제사회봉사회 - - - 12

1014 7 280 464

159) 보건사회부, 『건국10주년 보건사회행정개관』 (1958) p.317. (중앙입양원 보관본 참조) “외국군의 주둔으로 파생된 혼혈아에 대하여는 미국기타우방제국(美國其他友邦諸國)으 로 입양함으로써 그들이 행복한 장래를 갖일수 있도록 조치중에 있으며 이들을 양연시 키기 위하여 한국아동양호회외사기관 (韓國兒童養護會外四機關)이 설치되고 있으며 四 二九0年五月 전국적으로 조사한 혼혈아의 수는(입양조치된 자는 제외) 국적별로 보아 미국계 898명, 영국계 5명, 土耳其계 34명, 중국계 71명, 기타 33명으로 도합 1,041 명이며 피부색으로 보아 백색 624명, 흑색 303명, 황색 114명이다. 남아는 525명이고 여아는 516명으로 연령별로 보면 5세까지 857명, 6세-9세 153명, 10세이상 31명이 있다. 1957년말까지 양자로 출국된 숫자는 다음과 같다”

의 국제입양을 바로 수행해 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미국국제사회봉사 회(International Social Service of USA)로부터 실무적인 지원을 받았으 나, 1956년부터는 미국인 해리홀트가 설립한 ‘홀트양자회’가 이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 내에서 입양대상 아동의 모집과 보호는 한국아동양호 회, 미국 내에서 양부모의 모집과 아동인도 절차는 홀트양자회로 역할분 담이 이루어졌다.160)

해리홀트는 1955년 10월 14일 최초로 자신이 직접 입양한 아동 8명을 포함한 15명을 데리고 미국 포틀랜드 공항에 내린 이후, 미국내 여론의 지지와 정치권의 지원을 통해 1964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과 미국간 국제 입양제도의 기본 틀을 만들어 놓았다.161) 홀트는 한국에서 대규모의 고 아원과 영아원을 운영하고, 1956년 12월부터는 입양아동을 수송하기 위 해 3~4개월마다 한번씩 전세기로 국제입양 아동을 이주시켰다. 1950년대 당시 한국 아동의 미국 입양은 전적으로 미국의 난민법의 고아규정과 쿼 터의 배정에 달려있었다.162)

홀트를 비롯한 국제구호기관들이 한국 전쟁 고아를 긴급구호를 위해 미국으로 입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난민법 상 'displaced orphan' 규정이 한국 아동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졌기 때 문이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난민비자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4,532명은 주로 유럽 아동들이었다.163) 미국 이민법 상의 ‘고아’ 규정은

160) 대한사회복지회 (2004), supar note 158, p.42, ISS USA의 감독으로부터 홀트양자 회로 한국아동의 국제입양의 지원 업무가 넘어갔다는 것은 후술하는 미국내에서 한국 아동의 국제입양이 미국내 정규 아동복지 체계에서 분리되고 이원화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내에서 한국 아동의 입양후 사후관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의 161) 홀트아동복지회 (2005), 미이다. supra note 155, p.36. 해리홀트는 이미 이 첫입양부터 한

가정에 2명의 입양만 허용하고 있던 당시 이민법을 자신에게는 예외적으로 8명까지 입양할 수 있도록 특별입법을 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명을 얻어냈다고 한다. 해 리홀트의 한국아동입양은 당시 공화당 뉴버거 상원의원 등 정치권 차원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162) Id.

163) Weil (1984), supra note 60, pp.280-281, U.S. INS의 비자발급 숫자를 바탕으로 재구성, 나라별로 보면, 대부분이 유럽국가들로, 오스트리아 244명, 체코슬로바키아 34명, 핀란드 4명, 프랑스 4명, 독일 1,157명, 그리스 1,300명, 헝가리 43명, 이태리 568명, 라트비아 202명, 폴란드 214명, 포르투갈 4명, 소련 50명, 유고슬라비아 236 명, 기타 150명, 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 4명, 일본 287명, 필리핀 15명 등이다. 일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유색인종 아동의 국제입양을 허용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한시적인 쿼터 배정이 아닌, 이민법상의 이민 자격의 하나로 미국 시민권자에 의해 입양될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고아의 지위를 규정하는 입법조치로 이어졌다.